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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소풍 Feb 07. 2021

내 옆 사람이 나를 초라하게 만든다

들키기 싫은 속마음을 만났다.

가끔은 솔직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 다가올 때가 있다.

그것이 내 마음이라는 것이 부끄러워서 아닌 척할 때가 있다.

오늘, 아닌 척하고 모른 척했던 내 속마음을 나에게 들켰다.




왠지 모르게 유난히 마음을 긁어대는 우울함을 떨치며 학교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아들에게 열쇠 꾸러미를 달라고 했는데 아들이 장난 삼아 던진 것이 팔뚝에 맞았다. 열쇠 꾸러미가 닿는 순간 엄청 아파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살살 던졌는데 그게 어떻게 아프냐며 황당하다는 표정의 아들에게 화가 치밀었다. 맞은 건 난데 왜 던져놓고 말대답인가 싶었다. 억울해서 심통을 내며 방으로 들어가는 아들에 대한 서운함에 가슴이 울컥했다. 마음을 달래며 생각해보니 사실 열쇠 꾸러미는 내 팔뚝에 제대로 부딪히지도 않았다. 그저 스쳐 지나간 열쇠 꾸러미에 팔뚝이 왜 그리도 아팠는지, 그게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그 이유가 떠올랐다.


며칠 전, 어설픈 영어로 같이 미국 생활을 시작했는데 지치지 않는 열정과 노력으로 좋은 성과를 이루어내는 친구와 반가운 안부 전화를 했다. 똑똑하고 야무진 그 친구가 늘 존경스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성격 좋은 그 친구가 좋으면서도 이상하게도 그 친구를 만나고 나면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기분이 들곤 했다.  나도 열심히 살고 있건만 나의 열심과 노력의 결과는 이 만큼뿐이구나 싶은 마음도 찾아오곤 했다. 그래서인지 그 친구와 헤어져 돌아오면 이삼일은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불편한 감정에 휩싸이고는 했다. 따뜻하고 사려 깊은 친구에게 그런 감정을 갖는다는 것이 한심하고 부끄러워서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했다.


한주 내내 우리 특수학급 아이들과의 반복되는 힘겨루기에 내가 하고 있는 일에 회의를 갖고 있는 참에, 오늘 아이들은 유별나게 더 말썽을 피웠다. 하지만 사실  정도는 늘 있는 문제들이었음에도 오늘은 별스럽게 더 우울했다. 아, 어쩌면 아이들이 아니라 그 친구와 통화 후 찾아온 복잡하고 부끄러운 속마음이 나를 힘들게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다. 아들이 던진 열쇠 꾸러미에 맞아서 아픈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부끄러워 차마 말하지 못하고 내 마음에 품을 옳은 감정이라 아니라고 눌러두었던 내 초라한 감정 꾸러미가 주는 통증이었다. 요 며칠 유난히 내 마음이 그런 감정들에 긁히더니 열쇠 꾸러미에 곪았던 감정이 터진 모양이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당연한 감정이라는 것을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내 감정의 실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속상하고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마음을 가진 내가 더 초라하고 별 것 아닌 사람인 기분이 들어 참 싫었다.




어려서 나를 열등감에 빠지게 한 것은 TV에 나오는 KBS 어린이 합창단 아이들이 아니라 음악 시간에 꾀꼬리 같이 노래를 불러 선생님께 칭찬을 받는 내 짝꿍이었다. 공부 잘해서 나를 배 아프게 만든 아이는 전국 수학경시대회에서 상을 받는 아이가 아니라 나랑 같이 놀면서도 척척 100점을 받는 친구였다. 부러워서 밉기까지 했던 것은 호랑이 선생님에 나오는 하이틴 스타가 아니라 반 친구들 뿐 아니라 선생님들에게도 특별한 사랑을 받던 내 단짝 친구였다. 대학 내내 부끄러워 아닌 척하면서도 질투의 불을 피우게 만든 사람은 미인대회 진선미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쿨하고 예쁘던 같은 과 친구였다. 직장 생활하는 동안 내가 가진 능력과 실력이 한심하게 느껴지도록 만든 것은 상사의 특별한 애정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는 발령 동기였고 결혼 그리고 육아를 거치는 동안 나를 초라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던 것은 사람 좋고 성격도 좋은데 외모까지 늙지 않는 딸아이 친구 엄마이자 같은 동네 이웃이었다.


멀리 있는 대단한 위인들의 인생은 결코 나를 주눅 들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동료나 발령 동기로 인해 열등감이 느낀다. 세 아이를 하버드 보내고 책까지 써낸 어떤 대단한 엄마의 이야기는 부럽지만 나를 자괴감에 빠뜨리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이 서울대에 간 동창생이나 전액 장학금으로 딸을 아이비리그에 보낸 옆집에 사는 동네 아줌마로 인해 실망감에 빠진다. '사랑의 불시착' 속 손예진이 아무리 동안이고 애교스러울지라도,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이 여전히 나이가 무색할 만큼 섹시할지라도 부러울 뿐 그로 인해 내가 초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비슷한 나이의 아이를 키우는 동갑내기 동네 아줌마가 나보다 십 년은 젊어 보이는 것에, 딸이 자기 친구 엄마가 예쁘다며 감탄하는 것을 들으면 나의 초라한 외모에 속이 상한다.

대기업 회장이나 국회의원 아무개가 몇 평 집에 살건 어떤 차를 타건 '너는 운도 좋구나'하는 생각이 들뿐이다. 그런데 같이 커피 마시고 가끔 밥도 같이 먹는 한국 아줌마가 새로 산 진품 구찌 가방을 가뿐하게 들고 새로 뽑은 아우디 자동차를 쿨하게 몰고 가는 모습에는 마음이 씁쓸하다.


노벨 문학상을 탄 작품이나 베스트셀러 작가의 책을 보면 그들의 위대한 문장력에 감동과 감탄은 일지만 내 글이 부끄럽지는 않다. 그러나 내 브런치 이웃 작가들의 고뇌와 숙고가 묻어나는 글과 창의와 위트가 가득하여 놀랍기까지 한 평범하지만 특별한 글을 읽다 보면 그들의 글향기와 글솜씨가 부럽다. 그래서 내면에 담긴 것이 부족하고 표현하는 재주도 없는 내가 쓴 글이 초라하고 부끄럽게 느껴진다.




우리는 옆에 있는 사람으로 인해 초라해진다.

우리는 억만장자나 대기업 총수 또는 미인대회 우승자로 인해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가까이에서 매일 만나는 이들이 나보다 조금 더 잘하거나 나보다 조금 더 잘 사는 것을 볼 때 열등감과 자괴감에 빠진다. 나보다 아주 조금 잘 난 옆 사람으로 인해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진다. 그로 인해 나와 삶의 영역을 공유하는 이들에게 말하기 불편한 껄끄러운 감정을 맛보게 된다. 부끄럽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아들이 던진 열쇠 꾸러미에 나에도 숨기고 싶었던 내 속마음을 들켰다. 그 마음을 마주 보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후련하다. 여전히 나는 내가 좋아하는 친구 또는 함께 커피를 마시는 이웃으로 인해 가끔은 초라해지고 문득 속상하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오늘 내가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니 그거면 되었다...... 생각했다.



*사진 출처 : https://pixabay.com/images/id-4823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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