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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소풍 Sep 09. 2018

안아키 엄마들은 아이를 안 아프게 키우고 싶었을 뿐이다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고 싶었던 꿈이 산산이 조각난 엄마들의 아픔에 대하여

안아키 엄마들은 왜 그랬을까? 아이와 함께 죽음을 택한 엄마는 왜 그랬을까?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 약을 안 쓰고 아이들을 키우려던 엄마들과

칠 년을 아이의 아토피와 함께 싸웠던 엄마가 잘못된 선택으로 받는 고통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

 



작년,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안아키)’  사태를 보면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데, 얼마 전 또 관련 기사를 보게 되었다. 아이에게 좋다는 것이 있다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엄마의 마음이다. 항생제 남용과 과한 약사용에 대한 우려가 만연한 가운데 ‘약을 안 쓰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울 수 있다’는 안아키의 슬로건은 엄마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엄마들의 마음을 악용한 도를 넘는 근거 없는 치료방법에 대한 맹신으로 아픈 아이들과 그 부모들이 고통받는 상황을 보며 참 마음이 아팠다.


비슷한 사례로, 몇 년 전 아토피로 고생한 아이와 함께 동반 자살한 엄마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죽은 아이와 엄마의 사연을 읽으면서 그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기까지 겪었을 아이와 엄마의 어려움이 가늠이 되어 참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안아키나 자살을 선택한 엄마 상황보다 더 마음을 무겁게 했던 것은 안아키를 맹신하여 아이들을 고통에 빠뜨린 엄마들과 아이와 함께 죽음을 선택한 엄마를 마구 매도하는 사람들의 냉담하고 냉혹한 반응이었다.

무모하고 생각이 부족하며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사람들의 비난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때로는 그 상황에 처해보지 않으면 절대 가늠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고통과 아픔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특히 그것이 내 아이와 관련된 어려움일 경우에는 그 아픔을 마주할 때마다 이성이 마비될 만큼 부모의 마음은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의사라는 사람이 설파하는 말도 안 되는 것들이 진리처럼 다가오고, 죽는 게 낫다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극단적인 마음이 되는 것이다.



안아키를 맹신하고 따랐던 엄마들이나 아토피를 가진 아이와 자살한 엄마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선택은 옳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히 조금 더 현명했더라면, 조금 더 용기를 내고 견뎌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밀려든다. 그러나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결정이 옳지 않았지만, 비난하고 정죄하기 전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어려움을 먼저 보아줄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둘째 아이는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심한 아토피 증세를 보였다. 그전까지 나는 아토피가 단순한 피부병의 일종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아토피는 약 바르면 낫는 상처도 아니고 식이요법이나 건강 관리를 잘하면 덜해질 수는 있겠지만 완전히 벗어나기 쉽지 않은 병이었다.


게다가 더 안타까운 것은 상처가 덧나고 피부 상태가 악화되는 것을 보면서도 긁을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가려움이 지속된다 것이다. 약이 효과가 있는 듯해서 발라서 빨리 낫게 하고 싶다가도 스테로이드 성분의 부작용을 보면 두려웠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에도 한 번 깨지 않고 깊이 자는 나였지만 다른 방에 있는 아들이 “사각” 긁는 소리 한 번에 한 밤 중에도 벌떡 잠이 깨어 달려갈 정도로 나는 예민해졌다. 그때 나의 유일한 소원은 한 번도 안 깨고 아침까지 자보는 것이었을 만큼 아토피 노이로제에 걸려있었다.


그 당시, 안 해본 것이 없었던 것 같다. 식이요법부터 시작해서 좋다는 유기농이나 한방제품들을 비롯해 남들이 좋다는 방법은 다 써봤다. 가끔 조금 변화가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아토피의 고통은 나와 아이에게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미칠 듯한 가려움에 내가 어떤 조치를 취해도 아이는 어느새 긁고 비비고 있었다. 바라보고 있기도 힘든 아이의 상처를 보며 아이를 붙들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한 번은 팔꿈치를 구부릴 수 없게 만들어 긁을 수 없게 하기 위해 1.5ml짜리 PET병 바닥과 입구를 잘라내어 통처럼 만들어 아이 팔에 끼우기도 했다. 가려움에 아이는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었다.


밤이 되면 심해지는 가려움에 잠을 못 자는 아이를 살피느라 잠을 잘 수가 없는 날이 계속되었고, 밤새 못 잔 아이가 지쳐서 자는 낮에도 맘껏 쉴 수 없는 나는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무력감과 피로감에 이성이 마비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태에 이르면, 치료될 수 없는 것 같이 아픈 아이를 보면, 어떤 짓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간절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안아키 회원들처럼 숯가루를 갈아먹여서라도 나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심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이와 함께 죽어서라도 아토피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는 무서운 생각도 품어보게 되는 것이다.


그때 제일 듣기 힘들었던 것은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엄마가 먹은 음식이나 태교에 문제가 있었든지 엄마가 예민해서 아이에게 아토피가 생겼을 거라는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뱃속에 아이가 생긴 순간 마시던 물도 다시 한번 살펴보고 하고 싶은 일도 아이의 건강에 해가 되는지 확인하고 하는 것이 엄마의 마음이다. 그런 마음과 정성으로 열 달을 보냈는데, 아이의 아토피가 나의 잘못으로 치부되는 주변의 은근한 비난은 견디기 힘들었다. 아이를 데리고 나가면 관심과 친절인 것처럼, 걱정해주는 척 던지는 사람들의 시선과 말에 외출하는 것이 두려웠다.



너무나도 감사하게 다섯 살 무렵 운동을 시작해보라는 지인의 권고에 태권도를 시작했는데 그것이 우리 아이에게는 효과가 있었다. 처음에는 땀이 나니까 자꾸 긁고 건들어서 고민이 되었는데 꾸준히 하면서 몸이 건강해지면서 조금씩 피부도 나아졌다. 아마도 그 시기에 운동이 우리 아이에게는 잘 맞았던 모양이었다.


지금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에게 여전히 가끔 부분적으로 아토피가 발병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아이는 “나는 왜 아토피를 갖고 태어난 거야?”라고 속상해한다. 아이의 심정이 다 이해되지만, 나는 짐짓 모른 척 아토피가 없으면 좋았겠지만 노력하면 또 괜찮아질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이번에도 잘 넘겨보자고 격려하며 가볍게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하지만 사실, 왜 내 아이가 아토피를 가지고 태어났는지 제일 많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좌절했던 것은 바로 나였다. 가려움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진물과 피딱지로 얼룩진 아이를 볼 때마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나에게 묻고 또 물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했었나, 내가 어떤 나쁜 마음을 품었었나 같은 생각으로 나를 질책하면서, 아이에게 미안하고 아이가 불쌍해서 자꾸만 눈물이 났다.  


안아키를 맹신하며 따랐던 엄마들은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를 위해 안아키 회원이 된 것이 아니라, 아이를 건강하게  기르기 위해, 아이를 안 아프게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다 그런 상황에 이르렀을 것이다.

일곱 살 난 아이와 같이 죽음을 택한 그 엄마는 칠 년 동안 하루도 마음 놓고 웃어본 날이 없을 정도로 죽고 싶은 것을 매일매일, 칠 년 동안을  참아왔을 것이다.


안아키 같은 무모한 것을 맹신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것이고, 칠 년 참은 거 일 년 더, 이 년 더 참다 보면 아이의 아토피가 나을 날도 왔을 테지만, 그들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안에서, 더 이상 내디딜 수 없는 절벽 끝에서 다른 선택을 찾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내 잘못인 것처럼 바라보고, 결국은 다 내 잘못인 것처럼 다가오는 몸서리치게 끔찍한 그 삶의 무게를 매일, 매 순간 온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엄마들은, 그 상황에 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결코 가늠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살을 후벼 파는 듯한 고통에서 버티고 있었던, 세상에서 제일 용감한 사람들이었을 수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못했을지라도 아이를 위해 싸우며 우리는 가보지 못한 깊고 어두운 터널을 걷고 또 걸어온 사람이었을 수 있다.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더라도 “너는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그 마음을 알아주었더라면, 박수를 쳐줄 수는 없지만 “그래, 그랬었구나” 그 눈물을 봐주었더라면, 선택의 책임은 당연히 그들의 몫일지라도 잘못된 선택의 고통까지 고스란히 감당하고 있는 그들의 아픔이 조금은 덜해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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