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사 Oct 08. 2018

가을의 사치, 추자도 삼치

가을엔 삼치회를 먹겠어요



제주항에서 쾌속선으로 1시간여. 그시간 내내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 수다로 단잠을 깨우던 어머님들과 함께 상추자항에 내렸다. 참조기의 고향답게 각종 참조기 조형물들이 나를 맞아 주었다. 몇 주 전 섬을 떠들썩하게 했을 <참굴비 대축제>가 끝난 탓인지 깨끗하게 정돈된 항구에는 한산함이 느껴졌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분명 제주에 속해 있지만, 제주에서 흔하게 보던 현무암도, 감귤나무도 보이지 않았다. 들리는 말씨도, 음식도 전라도의 향기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추자도가 ‘제주도의 전라도‘라는 말이 괜히 나온 건 아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추자도. 내게는 제주도 인근의 섬, 멸치 액젓의 고장, 올레 18-1코스 정도의 키워드로만 기억되는 섬이다. 제주에 살 때 제주 본 섬의 올레는 거의 다 걸었다. 하지만 추자도는 좀처럼 선뜻 떠날 용기가 나지 않아 언. 젠. 가.로 미뤄둔 코스였다. 마침 올레를 걷자는 지인의 말에 18-1코스를 제안했다. 올레길은 거들뿐, 사실 나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추자도에서 가을 삼치회를 먹자

     

평소 비린 음식을 즐기는 편이 아니다. 회도, 탕도, 구이도 비린 맛이 나면 아예 입을 닫아 버리는 편이었다. 어릴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원치 않아도 물고기들이 가득한 자리에 가야 할 때가 있다. 수산물을 파는 음식점에 들어가는 순간 코로 숨 쉬는 것을 멈춘다. 호흡은 오직 입으로만 한다. 식사가 시작되면 겹겹의 상추 위에 초장을 듬뿍 찍어 그저 초장 맛으로 회를 먹었던 시절이 있다.

     

하지만 언젠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남도에서는 삼치를 회로 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늘 로망처럼 꿈꾸는 음식이 바로 삼치회였다. 과거에는 삼치는 성질이 워낙 급하고 살도 물러 산지 인근에서만 맛보는 진귀한 음식이라고 했다. 지금이야 냉장수송시설이 발달해 대도시에서도 삼치회를 먹을 순 있지만 문제는 ‘비용‘과 ’ 신선도‘였다. 그렇게 삼치회는 나에게 만나지 못할 음식계의 유니콘 같은 존재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몇 해 전, 순천 여행을 갔다가 드디어 삼치회를 처음으로 맛봤다. 그간 편견으로 휩싸인 회알못 인생을 반성케 하는 맛이었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다. 남도 삼치를 먹어 봤으니 삼치회로 유명한 추자도에서 먹는 삼치회의 맛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그 호기심이 나의 발을 추자도로 향하게 만들었다. 1박 2일 일정이었기 때문에 첫날은 올레의 2/3를 걸었다. 마음만 먹으면야 하루에 다 걸을 수 있는 거리지만 내일 오후 배가 뜨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을 남겨두었다. 아직은 제법 뜨거운 햇빛 아래 몇 시간을 걷고 나니 잔뜩 무거워진 다리를 끌고 점찍어 두었던 식당으로 향했다. 상추자항 인근에는 근해에서 잡힌 선어들을 요리하는 식당들이 늘어서 있다. 그중에서도 삼치회로 이름난 <제일식당>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평일 저녁 6시. 주말이었다면 북적북적했을 식당엔 5~6명 정도의 단체 손님 외에는 테이블이 비어 있었다.    

     

자리에 앉아 벽에 붙은 메뉴판에서 삼치회를 분주하게 찾았다. 혹시나 오늘 준비된 물량이 다 떨어진 건 아닐까 조바심이 났기 때문이다. 삼치회 1kg 6만 원. 두 명이 충분히 먹고 남을 양이라고 했다. 나는 회알못, 지인은 회를 먹긴 하지만 회 킬러까진 아니라 너무 많이 주지 마시고 적. 당. 히. 주시면 된다는 말을 곁들여 주문했다. 회알못에, 술알못이라 반주는 제주 막걸리를 해야겠다 올레를 걸으며 생각했다. 하지만 주인 할머님은 "회에는 소주지"라며 초록색 제주 소주를 상 위에 턱 하고 올려주셨다. “그래 회는 소주랑 먹어야지” 하며 술알못 근성을 숨긴 채 프로 술꾼인냥 멘트를 내뱉었다.

     

주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느 횟집들처럼, 스끼다시들이 먼저 나를 맞아 주었다. 껍질콩, 문어숙회, 생오이, 부침개, 새우 숙회 등 익숙한 반찬들 사이 강렬한 포스를 풍기는 존재가 느껴졌다. 파김치, 묵은지 그리고 특제 양념장. 이미 순천에서 삼치회를 먹었을 때, 그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똑똑히 확인했었다. 그래서  추자도표 삼치회 조연들이 만들어낼 시너지가 몹시 궁금해졌다.

     


잠시 후, 주방장님은 자신의 두툼한 손처럼 두툼하게 썰린 삼치회를 한 접시 가득 들고 우리 테이블로 향해 오셨다. 주방장님은 삼치회를 테이블 위에 놓기도 전에 말씀하셨다. “삼치회 먹는 방법 아십니까?”. 주방장님의 자부심에 흠집을 내고 싶지 않아 모른 척 고개를 가로저였다. 삼치회를 알지 못하는, <삼알못> 육지 것들에게 한 수 가르쳐 주시기 위해 주방장님의 특별 강의가 시작되었다.

     

“삼치회는 말입니다. 요 빨간 쪽이 뱃살. 회색이 등살. 김을 맨 아래 깔고, 밥을 요맨큼 얹습니다. 그리고 삼치회를 간장 양념장에 흠뻑 적셔 올리고요. 요 파김치를 얹습니다. 완성됐으면 먼저 소주를 한입 탁 털어 넣고, 쓴맛이 가시기 전에 삼치 삼합을 한 입에 딱 먹어야 삼치회의 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회는 잘 모르지만 성실한 육지 것 두 명은 주방장님의 시범을 그대로 따라 소주를 한 잔 마시고 삼치회 김 쌈을 입에 넣었다. 으잉? 우아아. 이거 녹네 녹아. 샤베트가 따로 없다. 씹기도 전에 구멍 숭숭 뚫린 김사이로 간장 양념 듬뿍 머금은 삼치회가 사르르 녹아 나왔고, 비릿함이 입안에 퍼지기도 전에 알싸한 파김치가 강렬한 맛과 향으로 강력 방어를 한다. 새초롬한 육지 것들이 연신 맛있다 노래를 부르며 먹고 있으니 주인 할머니는 슬쩍 우리 테이블 위에 접시 하나를 올린다.

     

“우째쓰까~ 다 떨어져서 손님상에 내놓을 양이 아닌데 맛이나 보쇼잉”

  


접시 안에는 제대로 곰삭은 갓김치가 다소곳하게 담겨 있다. 지난해 담갔던 갓김치는 바닥이 나서 갓철이 되어 갓김치를 담글 때까지 파김치, 묵은지만 나간다고 했다. 먹성 좋은 우리를 예쁘게 봐주셔서 얻게 된 한 접시의 호사다. 다시 소주 한잔을 마시고 갓김치를 얹은 삼치회를 먹었다. 쿰쿰하게 익은 갓김치는 그야말로 [ GOD-김치 ]였다. 젓국도 고춧가루도 듬뿍 들어간 갓김치에 간장 양념장도 가득 찍었는데 왜인지 짠맛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바로 숙성의 힘일까?  

     

<제일식당>의 삼치회는 생물 참치를 하루 정도 숙성해 손님상에 낸다고 했다. 일명 당일바리 삼치는 고무처럼 질겨서 맛이 없고 숙성을 시켜야 입안에서 녹아드는 감칠맛이 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쫄깃한 식감의 회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아쉬울 테지만, 부드럽고 녹진한 맛을 회에서 느끼고 싶다면 단연 삼치회가 제격이다. 게다가 언제 어디서나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닌 계절성, 희소성이 있는 음식이라는 것도 매력점수 +200이 된다.  


     


삼치회가 바닥을 보일 때쯤 뒤따라오는 삼치 맑은탕(일명 삼치 지리)은 완벽한 마무리다. 삼치회를 뜨고 남은 부산물과 무, 청양 고추를 넣고 뽀얀 국물이 나올 때까지 끓이고 끓인 진국이다. 성인 2명이 소주 한 병, 삼치회 한 접시, 밥 한 공기를 먹었을 뿐인데 배는 꽉 찼다. 하지만 마지막 코스인 삼치 맑은탕을 거부할 만큼 난 매몰찬 사람이 아니다. 커다란 냉면 그릇에 담겨 나온 삼치 맑은탕을 보니 꿀렁꿀렁 위가 늘어난다. 맛이나 보자며 일행을 부추겨 국물을 한입 떠 넣었다. 뼈와 살이 흐물흐물해질 만큼 푹 끓여낸 삼치 맑은탕 국물은 그 자체로 일품요리였다. 육고기 곰탕과는 또 다른 진하고 구수한 맛이 국물에 퍼져 있었다.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맛에서 삼치라는 생선이 얼마나 넓고 깊은 바다를 헤엄쳐 왔는지 혀끝에서 느껴졌다. 보기엔 거칠고 투박하지만 맛 만큼은 섬세하다. 뽀얀 삼치 맑은탕의 맛은 매콤함으로 마무리된다. 비린내를 잡기 위해 청양 고추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삼치 맑은탕은 말하고 있었다. 착하고 순하기만 한 사람 속에도 인생에 한 번쯤은 뜨거운 한방을 품고 있으니 만만하게 보고 방심하지 말라고.  

     

일행이 계산을 하는 동안, 주방장님은 우리에게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술장고(?) 옆 또 다른 주류 냉장고에 가득한 갈색 페트병의 비밀은 실로 놀라웠다. 두 육지 것들은 그저 추자도가 멸치젓갈로 유명하니 멸치젓 숙성시키는 거겠거니 하고 짐작했다. 하지만 냉장고 가득한 그 갈색 패트 병들은 모두 삼치회 간장 양념장이었다. 삼치는 어디서도 구할 수 있지만, 이 식당의 양념장만큼은 이곳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지에서 온 여행객, 낚시꾼들은 물론 제주 본 섬의 높으신 분들도 이곳에서 양념장을 공수해 간다고 했다. 그 얘길 듣고 나니 양념장이 모자라 한 번 더 리필하고 반 정도 남겼었는데 그걸 남긴 게 후회됐다.

  

다음날 오전, 눈 뜨자마자 예상보다 일찍 북상한 태풍 때문에 오후 배의 결항 소식이 전해졌다. 2박째 일정은 전면 취소하고 오전에 하추자 신양항에서 배를 타야만 추자도를 탈출할 수 있다. 이때를 놓치면 적어도 3일 후에야 추자도를 나갈 수 있다. 태풍 덕분에 다시 계획은 틀어졌지만 추자도에 가야만 할 이유가 생겼다. 봄이 오기 전에 1/3 남은 18-1 올레길도 걷고, 겨울이 제맛이라는 추자도 삼치구이를 먹기 위해 다시 추자로 향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을에는 새우가 맛있새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