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고시마에 생긴 나의 아지트, 사쿠라지마
어떤 여행자들은 한정된 시간 동안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하기 위해 애쓴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풍광, 해보지 못한 경험, 맛보지 못한 음식 등등 낯선 것들과 마주하기 위해 1분 1초를 아껴가며 쓴다. 나 역시 그런 때가 있었다. 착한 어린이상을 받기 위해 포도알 스티커를 붙이듯 여행지에서의 낯선 경험을 미션처럼 수행하기도 했었다.
여행의 즐거움에 취해 갈수록 나이가 들어갔고 체력이 떨어졌다. 자연스럽게 새로운 것만을 위한 여행이 피곤하게 느껴졌다. 내 일상 속의 익숙한 것들과는 전혀 다른 여행지의 새로움들은 처음에는 분명 신선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고 보면 결국 그것도 익숙함의 범주에 들어가 버린다. 천천히, 자세히, 그리고 꾸준히 보다 보면 겉모습은 새로울지 모르지만 결국 본질은 내 곁의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번 가고시마 여행에서 가장 많이 간 곳은 사쿠라지마 섬이다. 7박 8일의 여행 동안 3번이나 갔다. 첫 방문은 당연히 관광이 목적이었다. 으레 사쿠라지마섬을 방문하는 보통의 여행자들이 그러하듯, 섬 내를 도는 아일랜드 뷰 버스를 타러 우르르 몰려가는 관광객들을 따라가다가 우리 가족은 딴 길로 샜다. 내가 사쿠라지마섬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점찍어 둔 족욕탕에 가기 위해서다. 거대한 활화산에 기대어 바다가 보이는 노천에서 족욕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그것은 나를 가고시마로 이끈 결정적 사진 속 풍경이었다. 그래서 사쿠라지마섬 족욕탕 방문을 이번 가고시마 여행 위시리스트 맨 위칸에 적어 두었다. 사쿠라지마항에서 도보로 약 10분? 사쿠라지마 용암 해양공원에 위치해 있다. 가는 길에 무인 가판대에서 족욕을 하며 먹을 귤까지 사서 신나게 도착했을 때, 내 눈 앞에는 예상 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
족욕탕은 텅 비어있다. 한가로운 족욕을 위해 사람들이 북적이는 주말을 피해 금요일로 일정을 정해두었다. 그런데 가득해야 할 온천물이 없다. 하얀 수증기를 모락모락 피어올라야 할 온천수가 흐르지 않는다. 사전에 확인했을 때 휴무 일정이 따로 표기되어 있지도 않았다. 여행은 늘 변수와의 싸움이다. 좀 당황하긴 했지만 재빨리 이 충격을 완화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원래 족욕 후 다음 일정이었던 점심을 좀 일찍 먹기로 한다. 급 검색을 통해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속도로 휴게소 안에 있는 식당이다. 섬 일주도로 옆 사쿠라지마의 특산물을 판매하는 토산점 옆에 위치한 소박한 식당이다. 휴게소 식당의 장점은 영업시간이 비교적 길다는 점이다. 보통 오전 11시 혹은 11시 30분부터 2~3시간 정도 런치 타임을 운영하고, 오후 5~6시 넘어서 디너 타임을 운영하는 식당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곳은 오전 9시부터 브레이크 타임 없이 운영한다. 다만 소박한 섬의 관광지답게 관광객이 빠진 늦은 시간까지 운영하지는 않고 오후 4시에 마감한다.
식당 입구에는 사진으로 된 메뉴판이 있었다. 대략 메뉴를 찜하고 해당 메뉴의 사진을 찍은 후 자리에 앉았다. 주문은 자판기를 이용해야 한다. 일본어로 되어 있다 보니 일본어 까막눈은 자판기 앞에서 같은 모양 글자 찾기에 열중했다. 그러다 등 뒤로 낯선 기운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작업복을 입은 아저씨들이 우르르 들어온다. 아마도 근처 공사장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인 듯싶었다. 왠지 먹지 않아도 이곳은 맛과 양 그리고 가격의 삼박자를 고루 갖춘 곳임을 확신하게 됐다. 전 세계 어딜 가나 아저씨들이 많이 있는 식당은 분위기는 모르겠지만 가성비만큼은 확실하다.
아빠는 잿방어 회와 흑돼지 된장조림이 들어간 정식, 엄마는 잿방어 회정식, 나는 사쿠라지마 코미깡(작은귤)로 반죽한 면이 들어간 우동을 주문했다. 잿방어, 사쿠라지마 코미깡 모두 가고시마의 대표 특산물인데 마침 제철인 재료들이었다. 겨울에 가고시마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판기에 돈을 넣고 주문서가 나오면 주방 앞 직원 분께 드린다. 직원은 우리의 자리를 확인하고 메뉴가 나오면 그 자리까지 가져다주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주문한 메뉴들이 우리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세련된 멋은 없지만 대신 푸짐한 양에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직원 분은 각 테이블에 비치되어 있는 소스를 샐러드에 뿌려 먹으라고 한다. 나무젓가락과 냅킨이 있던 자리 한쪽에 두 개의 소스 병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사쿠라지마 귤이 들어간 오리엔탈 드레싱과 참깨 드레싱이었다. 손님에게 먹고 싶은 만큼 마음껏 드시라는 사쿠라지마섬 어머니들의 패기가 마음에 들었다.
어머니들의 패기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코미깡 우동 세트에 사이드로 딸려 나온 채소 튀김의 크기는 거의 우동 그릇과 비슷할 만큼 볼륨감이 있었다. 단호박, 고구마를 굵게 채 썰어 뭉쳐 튀겨낸 튀김이었는데 그거 하나만으로 배가 가득 찰게 분명했다. 당연히 미리 튀겨둔 튀김을 데워주는 수준이었지만 포슬포슬하고 달큰한 채소 특유의 맛이 살아 있었다. 식은 튀김 특유의 찌듯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코미깡 우동 세트의 하이라이트인 우동은 약간 노란색이 도는 면에 쪽파, 어묵 조각, 텐카츠(튀김 부스러기)뿐이었다. 국물부터 한 입 떠먹었다.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감칠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그리고 면을 한 젓가락 집어 후루룩 넘겼다. 탱글한 면이 입안을 휘감은 후 떠난 자리에는 은은한 귤향이 남았다. 보통의 우동면보다 진한 색감은 사쿠라지마 섬에서 나고 자란 코미깡 덕분이었다. 분명 평소 내가 먹는 양에 비해 넘치는 양이었음에도 뒷맛이 깔끔했기 부담스럽지 않았다.
부모님이 드신 잿방어 회정식과 흑돼지 된장 조림 정식 역시 비린내 없이 맛은 깔끔했고, 양은 푸짐했다. 아빠는 기리시마에서 먹었던 흑돼지 된장 조림보다 이곳이 더 낫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회를 즐겨 먹는 편이 아니라 맛보지 않았지만 잿방어 회 역시 신선하고 식감이 좋았다고 했다. 곁들여 나온 사쿠라지마 무로 만든 츠게모노(채소 절임)는 빈틈없이 꽉 찬 맛이었다. 함께 나온 코미깡 푸딩으로 디저트까지 확실하게 배를 채우고 우린 식당을 나왔다. 부모님은 가고시마에서 먹은 식사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고 지금도 가끔 말하고 있다. 여행의 변수는 늘 당황스럽긴 하지만 그 끝에는 결국 기대하지 않은 즐거움을 남긴다.
든든한 배를 안고 여느 관광객들처럼 사쿠라지마 아일랜드 뷰 버스를 타러 갔다. 사쿠라지마의 주요 관광 스팟을 도는 버스 덕분에 구석구석까지 사쿠라지마를 즐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쿠라지마섬에 다시 올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식곤증으로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관광객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로부터 딱 하루 뒤, 우리 가족은 다시 사쿠라지마섬에 있었다. 사실 그날은 가고시마 시내를 도는 시티뷰 버스 여행을 했다. 주말이라 잠시라도 지체했다가는 관광객들에게 치일 거 같아 오전 8시 30분 첫차를 탔다. 오전부터 부지런히 다닌 덕인지 시로야마 전망대, 센간엔에서 구경하고 센간엔 내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바로 옆 센간엔 근처 명소(?)인 스타벅스에서 커피까지 마셨는데도 겨우 오후 1시가 넘었을 뿐이었다. 남은 오후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어제에 이어 큐트 패스를 이용했기 때문에 사쿠라지마 섬까지 가는 별도의 비용이 들지 않았다. 우리는 어제 이루지 못한 족욕탕 미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사쿠라지마로 가는 배를 탔다. 사람 많은 주말인데 설마 족욕탕이 오늘도 운영을 안하지는 않겠지 싶어 감행한 계획이었다. 사쿠라지마항에 배가 닿자 느긋이 걷는 부모님보다 앞서 발걸음을 재촉해 재빨리 족욕장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실망을 시켜드리고 싶진 않았다. 멀리서 하얀 수증기가 보이는 것 같았다. 신기루인가 싶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하니 분명 수증기였다. 게다가 몇몇이 족욕장에 앉아 있었다.
오! 럭키!
여유롭게 걸어오는 부모님께 빨리 오시라 손짓을 했다. 부모님의 얼굴도 환해졌다. 총 100m나 되는 긴 족욕탕 한편에 자리를 잡고 발을 담갔다. 뿌연 온천물은 제법 따끈했다. 눈앞에는 긴코만의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고 사쿠라지마 화산의 품에 안겨 족욕을 즐겼다. 가고시마의 겨울바람은 분명 차가웠지만 날카롭지는 않았다. 부드러운 해풍이 뺨에 닿았고, 따뜻한 물이 발가락 사이사이를 휘감았다. 엄마 아빠와 셋이 나란히 앉아 사쿠라지마산 작은 귤, 코미깡을 까먹으며 족욕을 하고 있으니 행복이 이거다 싶었다. 근처엔 길고양이들이 한가롭게 그루밍을 하고 있었다. 프라이팬 위에서 구워지는 인절미처럼 몸도 마음도 나른하게 퍼졌다. 엄마는 콧노래를 불렀고, 아빠는 핸드폰으로 연신 사진을 찍었다. 시간에 쫓기지도 않았고, 뭐라고 할 사람 하나 없었다. 느긋하게 보낸 사쿠라지마 족욕탕의 여운은 우리 가족을 다시 사쿠라지마섬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세 번째였다. 보통 여행객이라면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할 사쿠라지마섬을 우린 세 번이나 갔다. 그날은 가고시마 시내에서 묵는 마지막 날이었다. 마지막 밤은 공항에서 가까운 온천마을의 료칸에 묵기 위해 히나타야마로 이동해야 했다. 숙소의 체크아웃을 하고 코인라커에 짐을 맡기고, 료칸 체크인 시간 전까지 가고시마 시내 관광을 하기로 했다. 숙소에서 도보로 이동이 가능한 돌핀 포트로 향했다.
쇼핑몰과 식당가가 늘어선 돌핀 포트를 한 바퀴 돌았지만 부모님은 좀처럼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돌핀 포트의 이곳저곳을 목적 없이 걷던 부모님의 눈에 족욕탕이 들어왔다.
어? 여기도 족욕탕이 있네?
내점객들을 위해 마련된 자그마한 족욕탕을 보고 족욕탕에 들어가시라 권했지만 괜찮다신다. 그러면서 사쿠라지마섬에서 족욕하던 그때를 이야기하신다. 설마 하고 슬쩍 던졌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사쿠라지마섬 족욕탕에 갈까?
재빠르게 앉았던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말은 안 했지만 내심 다시 가고 싶으셨나 보다. 나는 여행 시 출국 전날은 빡빡하게 일정을 잡지 않는 편이다. 여행 기간 중 가고 싶었던 곳을 다시 한번 가고 싶기 때문이다. 이번엔 사쿠라지마섬 족욕탕 당첨이다. 세 번째 배를 타고 사쿠라지마섬에 도착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렇게 가볍게 마음을 먹고 오기 힘들 테니 지난번 맛있게 점심을 먹었던 휴게소 식당으로 향했다. 이번엔 가고시마 흑돼지 라멘을 시켰다. 전문점 못지않은 묵직한 국물에 쫄깃한 면발. 그리고 흑돼지로 만든 챠슈까지 완벽한 조합이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무인 판매하는 사쿠라지마 코미깡을 사서 족욕탕으로 향했다. 메뉴는 살짝 달랐지만 코스도 만족도도 비슷한 사쿠라지마 족욕탕 일정. 7박 8일의 가고시마 여행 중 세 번이나 사쿠라지마섬에 가다니. 족욕탕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가고시마에 다시 간다면 분명 나는 또 휴게소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사쿠라지마 족욕탕에 발을 담글 것이다. 바다 건너 남의 나라에 사방이 뻥 뚫린 나만의 아지트를 만든 기분이다. 마음이 허하고 머릿속에 북풍이 몰아칠 때면 사쿠라지마섬을 생각할 것이다. 긴코만의 상쾌한 바람이 건넨 위로와 사쿠라지마섬 온천수가 전한 따스한 온기. 말없는 그들의 응원에 에너지를 든든히 채우고 다시 내가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