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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Feb 27. 2019

아빠, 가고시마에서 어디가?

여행 경험치 +1이 상승하였습니다


47년생 아빠는 집에서는 늘 안방 티브이 앞에 스스로를 박제하는 전형적인 한국 아저씨 스타일이다. 그의 딸로 태어나 NN년을 살면서 보아온 아빠의 모습은 늘 그랬다.

     

아빠는 뭐든 귀찮아해!

아빠는 말이 안 통해!

아빠는 고리타분해!

아빠는 까다로워!

     

아빠에 대한 이런 나의 고정관념을 깨준 계기는 여행이었다. 매해 세 번 이상은 부모님과 여행을 떠난다. 반나절 근교 여행은 물론 보름 가까운 해외여행까지 적지 않게 다녔다. 낯선 땅에 선 아빠는 새로운 것에 눈이 반짝였고, 처음부터 냉큼은 아니지만 엉덩이를 떠밀면 싫은 척 하지만 결국은 해낸다. 이번 가고시마 여행에서도 아빠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나? 하고 놀란 사건이 몇 가지 있었다.

     

여행자에게 날씨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 여행을 가기만 하면 비가 오는 날씨 요정과 함께 여행을 다닌 적 있다. 분명 일기예보에서는 맑다고 했는데, 날씨 요정이 뜨기만 하면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맑은 날에 가야 그 빛을 발하는 그날은 가고시마에 온 지 4일 차가 되는 날이었다. 우리 가족은 그때 가고시마 중앙역에 연결된 쇼핑몰, 아뮤 플라자 꼭대기의 영화관에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그곳에 간 것은 전날, 아빠의 그 한 마디 때문이었다.

     

내일 비 오면 극장에나 가자

     

응?? 극장?? 일본에서 극장?? 일본 여행에 와서 극장??? 나도 적지 않게 해외에 왔었고, 특히나 일본은 횟수로 가장 많이 방문한 나라다. 그럼에도 난 일본에 와서 극장을 가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아빠는 첫 일본 방문에 극장에 가겠다고 하셨다. 이 호방한 아빠의 선택엔 이유가 있었다. 바로 포스터 하나 때문이었다. 내가 지하 드럭 스토어에 몇 가지 필요한 물품을 사러 간 동안, 엄마 아빠는 1층 로비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지루하게 딸을 기다리는 동안 한국에서 온 70대 덕후의 눈을 번뜩이게 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물의 왕국 st 다큐 영화 포스터. 매일 저녁 <6시 내 고향>을 보기 전 성스러운 통과의례처럼 보는 게 <동물의 왕국>이다. 비슷한 류의 동물이 나오는 티브이 프로그램의 덕후였던 아빠에게 더없이 매력적인 유혹이었다. “분명 일본말로만 나올 텐데 괜찮겠어?” 걱정스레 묻는 딸의 말에 아빠는 답했다. “어차피 동물 보러 가는 건데, <동물의 왕국> 볼 때도 설명은 주의 깊게 안 들었어 “ 아빠의 도전과 선택을 실현시켜 주기 위해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기 전 일본에서 극장 이용하는 방법을 담은 블로그들을 정독하며 시뮬레이션을 해갔다.   

     


다음날 눈을 떠 커튼을 젖히니 잔뜩 흐렸고 양은 많지 않았지만 분명 비가 오고 있었다. 이 비는 우리 가족이 영화관을 가라는 신호다. 밥을 먹고 주섬주섬 옷을 입고 챙겨 나와 가고시마 중앙역으로 향했다. 일요일 오전이었음에도 가족, 친구, 연인들로 북적이는 모습은 한국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빠, 엄마를 의자에 앉혀 드리고, 재빨리 표를 사러 갔다. 상냥한 직원은 손님들을 매표기로 안내했다. 어제 사진 찍어 두었던 포스터의 일본어 제목과 똑같은 모양을 한참을 두리번거려 찾았다. 일본어 까막눈인 아무리 봐도 내 눈엔 보이지 않는다. 손을 들어 직원분께 S.O.S요청을 했다. 외국인 관광객임을 단번에 캐치한 직원은 싱긋 웃고 재빨리 해당 영화의 이름을 손으로 짚어 준다. 그러고는 재빨리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부터 다시 나 혼자의 싸움이다. 인원수를 택하고 금액이 적힌 페이지가 나왔다. 일반 2D 영화의 성인요금은 1800엔. 전날 일본 영화관에 대해 서치 할 때 난 마음을 먹었다. 한국돈으로 18,000원 씩이나 주고 <동물의 왕국>을 굳이 보고 싶진 않았다. 돈도 돈이지만 나를 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부모님의 오붓한 극장 데이트를 지원해드리고 난 그 시간에 나만의 티타임을 가져야겠다 다짐했었다. 그런데 1800엔 아래 60세 이상 노년층을 위한 할인 요금 1100엔이었다. 오호 럭키! 주저 없이 2장을 구매했다. 그리고는 팝콘 세트를 사서 엄마 아빠에게 향했다. 티켓과 팝콘을 안겨 드리며 말했다.

     

“두 분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영화 끝나면 00시니까 여기서 만나.

그동안 나도 나만의 충전하는 시간을 가질게! “

     


나의 급작스러운 선언에 부모님은 잠시 당황하셨지만 집에서도 <동물의 왕국>을 즐겨 보지 않는 딸의 선택을 존중해 주셨다. 몇 번의 경험으로 부모님과의 여행에 있어 이런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자녀는 에너지를 충전하고, 부모님은 자녀의 도움 없이 해냈다는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

     

영화 상영 시작 10분 전, 입장을 알리는 직원의 목소리가 들리자 <한국에서 온 관광객입니다. 부보님이 이 영화를 보고 싶어 하세요. 상영관의 좌석까지 안내 부탁드립니다.> 번역기 캡처 본을 직원에게 보여주었다. 직원은 흔쾌히 나 대신 부모님을 모시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부모님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아래층의 식당가에 위치한 호시노 커피에 갔다. 팬케이크 덕후의 사명을 다해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노란 버터 모자를 쓴 팬케이크를 시켰다. 진한 일본식 커피와 달콤하게 사르르 녹는 팬케이크를 먹으며 앞으로 남은 여행의 날들을 대비해 에너지를 채웠다.

     

약속한 시간에 맞춰 엄마, 아빠와 헤어졌던 그곳으로 향했다. 이미 부모님은 와 계셨다. 두 분의 얼굴을 보니 다 달아나지 않은 잠 기운이 얼굴 구석구석에 묻어 있었다.

     

딸 :  영화는 어땠어? 재미있었어? 

아빠 : 뭐 동물의 왕국이지. 

엄마 : 나는 잠깐 졸았는데 아빠는 반이 넘게 졸아서 내가 계속 아빠 깨웠어.

아빠 : 졸았던 게 아니라 그냥 눈을 감고 있었던 거라고.

엄마 : 그럼 코는 왜 골아? 아유 창피해서 정말...

     

나는 두 분의 토닥임을 보고 있으니 마음 한편이 편안해졌다. 어쩌면 나보다 더 여행을 적극적으로 즐기고 계신 부모님이 고마웠다.  

     



부모님과의 여행은 젊은 사람들의 여행과 호흡부터 다르다. 아침잠이 없는 부모님과의 여행은 보통은 아침 일찍 일정을 시작해 오후 4~5시 무렵이면 숙소에 돌아온다. 그리곤 한숨 주무시고 저녁을 먹는다. 그 후 잠시 수다를 떨고 간식을 먹다 9시 무렵이면 잠이 드신다. 여행의 꽃이라 생각했던 [ 나이트 라이프 ]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답답하기도 했지만 부모님의 생체리듬에는 그게 당연했다.

     

그날은 사쿠라지마섬을 다녀온 후 장을 봐서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 식사 전까지 1~2시간 정도 자유 시간이다. 대게 나는 오늘 찍었던 사진을 정리하거나 내일 여행할 곳에 대한 정보를 찾는다. 엄마는 낮잠을 잠깐 주무시고 아빠는 거의 티브이를 보신다. 아빠는 여행지에 오면 말이 안 통하기 때문에 보통 스포츠 시청하신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스모뿐이다. 영 호감이 없는 스포츠를 뒤로 하고 아빠는 우리나라로 치면 가고시마판 <6시 내 고향>이나 <생생 정보>쯤이 될 프로그램들을 번갈아 보고 계셨다. 그러다 말씀하셨다.

     

저기 가보자!

  

티브이 속에는 허름한 야끼 모찌(구운 찰떡)을 파는 오래된 가게가 나오고 있었다. 어? 그런데 배경이 낯설지가 않다. 우리가 가고시마 공항에서 공항버스를 타고 내린 가고시마 중앙역 앞 버스터미널 근처였다. 뭐 먼 곳도 아니고 어려운 일도 아니니 알겠다고 하고 가게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구글맵을 뒤졌다. 아직 저녁 먹기까지 시간이 좀 남았고 숙소에서 5~10분 거리니까 문 닫기 전에 사와야 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엥? 그런데 영업시간이 오전 6시부터 오후 2시까지다. 이미 마감 시간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내일을 기약해야 했다.

     

다음날은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가고시마 시내 구석구석을 도는 일정이 아침부터 시작된다. 버스를 타러 가기 전, 야끼 모찌가게부터 들렀다. 최소 30~40년이 됐음직한 빈티지한 가게에 중년의 여주인 혼자 숯불에 떡을 굽고 있었다. 티브이 나온 다음날이니 손님이 줄이 길지 않을까 했는데 손님은 우리 앞에 남자 한 분뿐이었다. 단정한 유니폼을 입은 모습이 아마 버스 기사님인 듯싶었다. 운행을 앞두고 간식 삼아 사 드시는 듯했다. 세월의 연륜이 느껴지는 분위기와 여주인의 포스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주저 없이 100엔짜리 야끼 모찌 3개를 사서 버스터미널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 차가운 가고시마의 겨울바람을 피하기 위해서다. 셋이 나란히 의자에 앉아 시식을 시작했다.


시식에 정신이 팔려 찍은 사진이 없어 구글링으로 찾아낸 자태



투명 비닐로 감싼 찹쌀떡은 방금 구웠는지 따끈했고 갈색 간장 빛 옷을 입고 있었다. 짭조름한 간장 향과 숯불향이 어우러져 식욕을 자극했다. 기대감에 가득 차 조심스럽게 비닐을 벗기고 야끼모찌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입안에 강렬한 짠맛이 입안에 퍼진다. 그리곤 쫄깃한 찹쌀떡 사이사이 간간이 거칠게 살아 있는 밥알이 느껴진다. 당고의 단짠단짠한 소스를 생각했던 입엔 실망감이 차올랐다. 나만 이런 건가 싶어 부모님의 반응을 살폈다. 부모님의 표정도 썩 밝지는 않았다.

     

딸 : 어때? 

아빠 : 짜네. 

딸 : 옛날 스타일이라 그런가 봐. 딱 봐도 그런 분위기였잖아. 

     

분명 실망했을 아빠를 다독였다. 예민한 입을 가진 아빠. 그래서 엄마는 결혼 이후 삼시세끼 아빠의 식사를 차리는 것에 평생의 스트레스였다. 딸은 여행 때면 늘 아빠의 구미에 맞는 식사와 간식을 대령하느라 온 신경을 썼다. 입이 까다로운 아빠의 성에 차지 않을 맛이다. 대신 우리는 경험이란 선물을 얻었다. 구글맵에 한국인 리뷰가 1개 없는, 현지인 리뷰조차 2개뿐인 작고 소박한 이 야끼모찌 가게를 다녀간 몇 안 될(?) 한국사람 중 유니크한 가족이 된 것이다.  


味覚屋 焼き餅

일본 〒890-0053 Kagoshima-ken, Kagoshima-shi, Chūōchō, 1212

     

부모님과의 여행에서는 늘 내가 계획을 짜고, 이끌고, 마무리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좀 결이 달랐다. 즉흥적인 아빠의 제안에 계획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분명 가치 있는 경험이 쌓였다. 지인들과 이번 여행 후일담을 나눌 때, 극장에 갔고 티브이에 나온 현지 방송의 맛집(?)을 갔다는 얘기를 하면 다들 놀란다. 여행을 자주 갔어도 여행지에서 극장에 갈 생각도 못해 봤는데 부모님들 대단하시다 칭찬이 이어졌다. 나도 놀란 그 부분에 지인들도 공감했던 것이다. 그렇고 그런 유명 관광지를 찍는 여행 말고 적극적으로 자신들만의 유니크한 경험들을 쌓아 가는 여행을 하는 부모님을 보니 뿌듯함이 차올랐다.  다음 여행에 우린 또 어떤 경험치 +1을 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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