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베르나베우까지 가는 길
스페인에 가고 싶은 이유 중 8할은 레알 마드리드 구장에 가서 직관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밤을 새워 가며 해외 리그 경기를 챙겨 보고, 경기 결과에 일희일비 하지 않는다. 선수들의 이적 소식에 빛의 속도로 빨리 손익 계산기 두드리는 열정적인 축덕은 아니다.
그저 야구보다는 축구를 조금 더 좋아하고, 특별할 것 없는 주말 밤에는 축구 중계를 안주 삼아 맥주를 들이키는 것을 좋아한다. 가끔 K리그 직관을 가는 수준의 깊이가 습자지 수준의 야매 축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행 티켓을 끊은 이유는 오직 <레알 마드리드> 때문이었다. 우리 형이 있고, 우리 동생이 있고, 지단 횽아가 있는 그곳! 야매라도 축덕 인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이 시기에 스페인에 가게 되었는데 그 축덕의 성지를 아니 갈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야 레알 마드리드의 영원한 라이벌 FC바르셀로나와의 더비 경기, 엘 클라시코를 봤으면 한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구 반대편에 사는 가난한 아시안 축덕에겐 3대가 덕을 쌓아야 가능한 일이란 걸 나는 알고 있다. 마드리드에 있는 동안 홈경기가 있는 게 어딘가? 그거 보자고 마드리드까지 갔으니 어느 팀이든 경기가 있는 거에 감사해야 한다.
라리가 직관은 지구 반대편 축덕이 보기엔 여러 장애물들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여행 일정 안에 경기가 있느냐가 첫 번째 문제고, 경기가 있다 하더라도 경기가 확정 되느냐마냐는 또 다른 문제였다. 알아본 바로는 EPL은 한 달 전에는 스케줄이 확정되는데 라리가는 빨라야 3주 전, 보통은 일주일 전, 운이 나쁘면 3일 전에 확정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베르나베우에 입성하느냐 마느냐 운명은 하늘에 맡겨야만 했다. 나도 내가 마드리드에 머무를 때, 어떤 경기가 있는지 정도만 확인하고 비행기를 탔고 예매는 마드리드 입성 전 도시였던 포르투갈 포르투에서 했다.
전 세계에 축구팬이 있는 만큼 다양한 언어로 된 사이트가 있지만, 안 친한 문자들 사이 그나마 덜 어색한 영어로 더듬더듬 번역기를 돌려가며 예매를 시도했다. 좌석은 마음 같아서야 선수들 땀구멍도 보이는 자리에 앉고 싶지만, 가난한 여행자는 3층도 감사하며 예매를 한다. 하지만 문제는 결제! 뭔 일인지 내가 가진 해외 결제 가능하게 해 놓은 비자 카드로는 거듭 승인 거절이 났다. 알고 보니 일부 해외 사이트의 경우 카드 도용 등 결제 시 사고가 많아 카드사에서 막아놓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젠장! 나와 같은 곤란해 처했던 선배 축덕들의 조언에 따라 몇 번 시도하다가 결국 페이팔로 갈아탔다. 그간의 노력이 무색해지게 스무뜨(?)하게 결제가 이뤄진다.
아! 드디어 나도 레알 경기를 보게 되는구나!!
경기 3일 전, 나는 리스본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마드리드로 넘어왔다. 밤새 좁은 기차 침대칸에서 뒤척이며 국경을 넘었더니 마드리드에 도착했을 때는 몸이 너덜 너덜한 상태였다. 게다가 하늘은 잔뜩 흐리고 부슬부슬 비까지 오기 시작했다. 여행 때면 유독 날씨 영향을 많이 받는 컨디션의 소유자인 나! 마드리드의 낭만을 느끼는 것은 사치다. 레알 직관을 위해 무슨 짓을 해서든 컨디션을 끌어올려야 했다. 마드리드 입성 첫날은 모든 일정을 스톱하고 숙소에 들어가 잠부터 잤다. 둘째 날은 여행 동지와 떨어져 혼자 본 경기에 앞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사전 답사 겸 경기장 투어에 나섰다. 그렇게 마드리드에서의 일정은 모두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스타디움 투어 티켓을 사는 것만도 엄청 긴 줄을 서야 했다. 그래도 내 인생에 또 없을 기다림이었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오가는 사람들을 하나 하나 살펴 보는 것도 꽤 큰 즐거움이었다. 중국, 중동에서 온 명품으로 휘감은 부자 팬, 꽤 쌀쌀한 날씨임에도 시원한 옷차림이 인상적인 남미 팬, 유모차 안의 애는 지루해 죽는데 아빠의 눈빛은 반짝이던 가족 팬, 호날두 팬인 여자 친구 덕분에 끌려(?)온 남자의 심드렁한 눈빛이 인상적인 커플 팬 등 이 모든 사람들이 레알 마드리드라는 이름 때문에 모인 거라니 신기했다. 그리고 그 안에 내가 있다는 게 제일 놀라웠다.
투어는 두가지가 있다. 개방된 지역을 자유롭게 구경 개별 투어와 전문 가이드가 안내하는 가이드 투어. 한국어 가이드가 없는 한 난 들어도 어차피 모르니까 각개전투를 택했다. 레알 마드리드의 역사를 한 눈에 보는 전시관 부터 선수들의 땀방울이 스며 있을 라커와 경기장, 마지막으론 오피셜샵으로 이어지는 코스다. 보는 내내 한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이들에게 레알 마드리드는 그저 하나의 스포츠 구단이 아니라 역사고 인생이고 생활이구나! 그리고 팬들의 주머니를 바닥까지 긁는 구나! 전시관은 하나의 스포츠 영화를 본 기분이었고, 오피셜 샵은 가난한 여행자도 지갑을 열게 했다.
양손 무겁게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구장을 나서서 경기장 근처의 한식집으로 향했다. 난 혼자 였는데 그곳은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의 점심 식사가 한창이었다. 그들의 눈빛이 좀 의식되었지만 애써 덤덤한척 자리를 잡았다.
매콤한 국물이 먹고 싶어서 한국식 짬뽕과 녹두전을 시켰다. 오랜만에 먹는 매콤한 음식에 집중하다 보니 옆 그 단체 관광객들이 다 떠났는지도 몰랐다.
드디어 결전의 그날! 경기 3시간 전, 지하철을 타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도착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전 세계에서 모인 팬들로 들썩인다. TV로만 보던 레알 마드리드 구장 앞에 내가 서 있다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야매 축덕이 묘한 감정에 취갈 때쯤, 번뜩 생각이 들었다. 티켓 끊어야지. 잽 싸게 티켓을 뽑으러 간다. 현장 구매하는 창구 말고, 별도의 창구가 있으니 혹 가시게 되는 분들은 헷갈리지 마시길!! 나는 그것도 모르고 한참 줄을 섰다가 경기장 반대 편까지 먼 고행의 길을 떠나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티켓 두 장을 쥐었을 때 뭔가 엄청난 감동의 파도가 덮쳐 오는 것 같았다. 결제했던 카드와 여권을 내미니 창구 반대편에서는 티켓 두 장을 내어준다. 겨우 이 티켓 두 장 때문에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왔다니… 이게 꿈일까? 생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