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한 여행을 위한 짐 싸기의 기술
여행 좀 다녀 본 여행자들 사이에는 그런 말이 있다. 여행을 위해 싸는 짐의 무게는 전생에 쌓았던 업보의 무게라는 것. 처음 들었을 때는 웃으며 넘겼던 말이 여행 경험치가 쌓이면 쌓일수록 진리구나 싶었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기 전, 짐을 쌀 때면 어떻게 하면 간결하게 짐을 쌀까?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사용 빈도 및 활용도를 중심으로 우선순위를 메기고 하위권은 가차 없이 캐리어에서 뺀다. 혹시나 쓸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순간 당신이 전생에 쌓은 업보가 얼마나 큰지 새삼 생각하게 될 것이다. 무엇을 빼야 할지 헷갈릴 여행 초심자들을 위해 몇 가지 불필요한 물건들을 꼽아 봤다.
나는 감히 여행의 질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신발‘이라고 말하고 싶다. 걷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여행의 필수 무기가 ‘신발’이다. 떠나는 날의 설렘에 취해 여행 날 신으려고 새 신발을 산적이 있다. 소풍 전날 설레 잠 못 드는 어린아이처럼 여행 떠나기 전날 밤, 반짝이는 새 신발을 머리맡에 두고 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 새 신발을 신고 룰루랄라 공항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본격 여행이 시작되고 낯선 땅에 하나 둘 발도장을 찍어 갔다. 그런데 서서히 불편함이 느껴졌다. 발볼이 조이는 게 느껴졌고, 뒤꿈치가 까졌다. 급히 일회용 밴드로 긴급 처치를 했지만 여전히 욱신거렸다. 온 신경이 발에 가 있으니 눈앞의 절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손꼽아 기다린 현지 음식도 도통 그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예정보다 일찍 일정을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와 발을 살폈다. 새 신발 안에서 혹사당한 발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엄지발가락 옆쪽은 마찰 때문에 빨갛게 물집이 생기기 직전이었다. 일회용 밴드로 응급 처치한 발뒤꿈치는 피 떡이 져 있었다. 새 신발을 향한 과욕이 부른 참사였다. 소독을 하고 약을 바른 발을 주무르며 생각했다.
나처럼 많이 걷는 여행을 하는 사람에게 새 신발은 사치구나
이날의 교훈 이후 여행 갈 때 새 신발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최소 반년 이상 신어 나의 발에 착 붙는 신발만이 나의 여행 메이트가 될 수 있다. 새 신발을 여행 때 꼭 신고 싶으면 최소 2주 전에 구매해 일주일 이상은 미리 신어 발에 길들여 놓는다. 사람도 신발도 서로에게 맞춰가고 길들여 가는 시간은 꼭 필요하다.
평소 책을 즐겨 읽지 않는 사람도 비행기 안에서나 선 베드에 누워 유유자적 책을 읽는 사람들의 인증샷을 떠올리며 책을 여행 짐 안에 넣곤 한다. 출발 전에는 다들 그런 마음이다. 하지만 현실은 작정하고 읽겠다고 애써 시간을 내지 않는 이상 우리의 여행은 늘 빠듯하다. 새롭고 신기한 풍경, 경험들에 정신이 팔려 여유롭게 책을 읽을 마음의 짬이 나지 않는 것이다.
여행 중에는 그렇다 쳐도 숙소로 돌아오면 잠자기 전에 할 일 없으니까 읽겠지? 오산이다. 잠들기 직전까지 하루 종일 찍은 사진을 정리하거나, 다음날 여행 동선을 확인하기 바쁘다. 평소 쓰지 않는 에너지까지 박박 긁어 쓴 덕에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지는 날들이 부지기수다. 고백하건대 읽기는커녕 베개로도 못쓴 것은 물론 책을 캐리어 밖 세상 구경도 못 시키고 그대로 한국으로 가져온 경우도 부지기수다. 평소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책 덕후가 아닌 이상 굳이 여행 가서 여러 권의 책 읽을 생각은 곱게 접어 두는 게 좋다.
한국인들에게 라면은 어떤 존재일까? 라면을 좋아하지 않는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 라면은 한국인의 소울 푸드다. 그래서 많은 여행자들이 비상약을 챙기듯 비상 라면을 챙겨 간다.
언젠가 한겨울, 서유럽을 여행한 적이 있다. 한국의 겨울에 비하면 분명 기온도 높고 혹한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뼈가 시렸다. 연일 찌뿌둥한 하늘에서는 비가 흩뿌렸다. 난방 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해도 그 순간뿐이었다. 샤워로 몸에 열기를 채워도, 냉골 방의 침대로 들어가면 금세 식어 오들오들 떨며 선잠을 자곤 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나니 몸에도 한계가 왔는지 으슬으슬 한기가 몰려왔다. 강력한 몸살감기의 공격이 시작되었음을 직감했다. 비상용으로 챙겨 온 약도 떨어진 상태라 어찌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근처 아시아 마트를 뒤졌다. 역시나 메인 자리에 빨간색 봉지의 한국 라면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 신이 나서 소중하게 품에 안고 돌아왔다. 주방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은 숙소라 전기 포트의 뜨거운 물로 고등학교 만들어 먹던 실력을 발휘해 뽀글이 한 봉지를 완성해 냈다. 허겁지겁 라면 한 봉지를 클리어하고 나니 뼛속 깊이 박혀 있던 서유럽의 한기가 녹아내렸다. 유럽 여행 중에 맛볼 수 없었던 맵고 뜨거운 국물이 몸 구석구석 퍼질 때 ‘라면’이 말을 걸어왔다.
그동안 힘들었지? 괜찮아. 이제 괜찮아질 거야
라면의 은혜로 감기몸살의 위기에서 탈출한 이후 여행을 갈 때면 근처에 중국 마켓이나 아시안 마트가 어디 있는지 꼭 위치를 확인한다. 한류의 영향으로 이제 어디서나 라면을 구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남태평양 한가운데 바누아투의 서민 마트에서 비빔면, 불닭볶음면을 만났을 때 난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저 반가웠을 뿐이다. 이제 지구 어디든 마음만 먹으면 한국 라면을 구하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세계 어딜 가든 괜히 라면을 한국에서부터 무겁게 이고 지고 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불필요한 짐들이 늘어나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는 바로 ‘혹시나’이다. 세상 어딜 가도 구할 수 없는 물건은 없다. 다만 비용이 많이 들고, 원하는 수준의 질을 보장할 수 없다는 단점만 감수한다면 말이다. 짐도 마음도 가볍게 떠난 여행이야 말로 돌아올 때, 채워올 것들이 많아진다. 이번 여름, ‘혹시나’하는 마음의 짐에 압사당하지 말고 가볍게 훌훌 떠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