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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ug 02. 2019

여행자의 하루를 마감하는 완벽한 마침표, 맥주

낯선 땅에서 만난 긴 여운을 남긴 맥주들


  




평소 맥주 500ml 한 잔이면 얼굴은 파운데이션을 뚫고 강력한 홍조가 올라온다. 조금 더 마시면 온 몸에 빨간 땡땡이 반점이 번져간다. 500ml 두 잔을 못 넘기고 화장실로 가 속을 비워내야 무사히 집에 갈 수 있다. 선천적으로 알코올을 분해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인간 중 한 명이다. 그럼에도 술 중에는 그나마 맥주를 제일 즐겨 마신다. 소주처럼 쓰지도 않고, 와인처럼 머리가 아프지도 않기 때문에 내게 맥주는 슬기로운 음주생활을 위한 필수품이다.

     

물, 맥아, 홉, 효모 등 미묘한 차이를 캐치해 낼 정도로 맥주 맛에 예민한 혀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다만, 여행을 떠나 낯선 땅에서 잠드는 밤, 잠들기 전 숭고한 의식을 치르듯 현지 맥주 한 모금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그 순간을 사랑한다. 말도 안 통하는 낯선 나라에서 무탈하게 하루를 마무리했다는 감사와 내일도 즐거운 하루가 되기를 바라는 기원을 더한 일종의 의식이다. 마치 고된 육체노동을 마친 건설 노동자가 퇴근길에 대폿집에 들러 탁주 한 사발로 그날의 피로를 씻어내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행지에서 현지의 맥주를 맛보는 그 순간의 즐거움을 사랑하는 1인이기에 맥주로 유명한 지역을 일부러 여행 루트에 넣기도 한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내 입속에 그리고 내 머릿속에 긴 여운을 남긴 몇몇 맥주들을 소개한다.

 


포르투갈의 사그레스(Sagres) 

     

한 달이 넘는 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한국을 떠났던 때였다. 런던과 에든버러에서 열흘을 보내고 포르투갈로 넘어가야 했다. 일 때문에 함께 출발하지 못한 나의 여행 메이트와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터였다. 에든버러에서 포르투갈로 넘어가는 (당시) 유일한 직항은 국제공항이 있는 파로(Faro)라는 도시로 가는 비행기뿐이었다. 파로? 처음 듣는 지명이었다. 유럽 사람들이 사랑하는 포르투갈 남부의 휴양도시라고 했다. 나에게 선택권은 두 개였다. 에든버러에서 런던을 경유해 리스본으로 가거나, 아님 파로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1박 후 고속버스로 리스본으로 이동하는 방법. 난 길게 생각하지 않고 후자를 택했다. 시간도, 돈도 많이 드는 비효율적인 루트다. 감히 불시착이라고 말할 만큼 어처구니없는 선택이었다. 선택의 이유는 단순했다. “많은 사람들이 안 가본 곳에 가보고 싶다 “는 이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파로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을 때만 해도 파로에 대한 포스팅이나 여행정보는 전무했다. 다들 포르투갈의 유명한 휴양지 라고스로 넘어가는 길에 지나치는 도시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정보가 없으니 도무지 어떤 도시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설렘 반 기대 반 부푼 가슴을 안고 파로에 도착을 때, 에든버러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따뜻한 공기가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서 와! 여기는 포르투갈의 남부 휴양지 파로야!

 

여행도 열흘이 넘어가면 생활이 된다. 내가 파로에 도착했을 때는 여행의 설렘이 어느 정도 잦아든 10일 차였다. 성수기가 지난 10월의 파로는 한산했다. 들뜬 바캉스족은 없었다. 따뜻한 기후, 저렴한 물가 덕분에 긴 휴양이나 요양을 온 가족 여행객과 노년의 은퇴자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단 하루 머물지만 그들 안에 재빨리 스며들었다. 혼자 여행의 장점이자 단점은 삼시 세 끼를 의무처럼 챙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근처 동네 마트에 들러, 요깃거리를 샀다. 전자레인지에 데우면 끝인 라자냐와 돼지고기 스테이크. 그리고 맥주 두 캔이 오늘 밤 나의 친구가 되어줬다. 그때 처음 사그레스와 만나게 됐다.

     

맥주 좀 안다는 사람들은 포르투갈 맥주 하면 먼저 수퍼복을 떠올릴 것이다. 나도 수퍼복만 알고 갔던 포르투갈에서 예상 밖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그레스는 수퍼복과 함께 포르투갈 맥주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국민 맥주였다. 북쪽이 수퍼복이라면 남쪽에는 사그레스가 있다. 사그레스라는 이름 또한 해안절벽으로 유명한 남부 지방의 휴양 도시의 이름이라고 했다.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남부 포르투갈 파로의 밤. 알아들을 수 없는 포르투갈어가 나오는 TV 방송을 BGM 삼아 틀어 놓은 채, 사그레스를 홀짝였다. 특별한 맛이 기억에 남는다기 보다는 사그레스를 마시던 파로의 밤이 기억에 남는다. 안주 대신 자발적 불시착을 선택한 나의 빗나간 촉을 연신 곱씹었다. 이렇다 할 볼거리, 먹거리도 없는 심심한 파로. 성수기에 왔더라면 이 도시에 대한 이미지가 다르게 박혔을까? 지금까지 뭔가를 꼭 해야만 하는 여행을 해왔던 내게 파로의 텅 빈 시간들이 말을 걸어왔다. 여행을 왔다고 뭔가를 꼭 하지 않아도 된다고 파로는, 그리고 사그레스는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포르투갈 하면 호날두 보다 사그레스를 마시던 파로의 텅 빈 밤이 떠오른다.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Kilimanjaro) 


우리나라의 몇 배에 달하는 크기의 거대한 탄자니아. 열흘 간 탄자니아 이곳저곳을 사륜구동 자동차에 몸을 싣고 헤맸다. 도지사부터 에이즈 환자까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났고, 이야기를 나눴다. 사회 기반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 않은 저개발 국가에서 무사히 돌아다니기 위해서 지켜야 할 것이 있다. 모든 일정을 해 뜨는 시간에 시작해 해가 저물기 전에 마무리해야 했다. 해질 무렵 숙소에 돌아와 겨우 샤워만 하고 저녁식사 겸 회의를 위해 다시 모인다. 운이 좋으면 흐릿한 전구 불빛 아래에서, 운이 없으면 겨우 촛불에 의지해야 할 어둠 속에서 밥을 먹었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도 휴대전화 손전등 기능에 의지해 맥주는 마셨다. 하루 종일 SUV를 타고 다니며 몸과 목에 쌓인 모래 먼지를 씻어 내기 위한 일종의 ‘처방’이었다.  

     

탄자니아에서는 참 다양한 종류의 맥주를 마셨다. 누가 들어도 딱 탄자니아스러운 맥주인 킬리만자로, 세렝게티, 사파리 외에도 은도브, 캐슬, 터스커(코끼리의 상아를 뜻함/ 케냐산이지만 탄자니아에서도 흔하게 마심) 등등 그중에서도 난 깔끔한 맛의 탄자니아 국민맥주 킬리만자로를 좋아했다. 관광을 간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일정에는 킬리만자로를 방문하는 계획은 없었다. 다만 SUV 안에서 멀리 보이는 꼭대기에 하얀 눈이 쌓인 산을 보며 ‘저기가 킬리만자로구나’하고 무덤덤하게 지나칠 뿐이었다. 그래서 킬리만자로 맥주를 마실 때마다 병에 붙은 킬리만자로산 로고를 어루만지며 언젠가 꼭 맥주 말고 산 킬리만자로에 오르리라 다짐했다. 청량한 킬리만자로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면 안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가로등도 네온사인도 없으니 칠흑같이 어두운 땅 덕분에 탄자니아의 밤하늘은 보석을 뿌려 놓은 듯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하다. 이 비현실적인 현실의 한가운데 내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바누아투의 터스커(Tusker)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마셨던 터스커를 남태평양의 작은 섬, 바누아투에서도 만났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거대한 코끼리 그림이 있던 아프리카의 터스커와 달리, 남태평양의 터스커에는 돼지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이 돼지는 어금니가 뾰족하게 튀어나온 바누아투의 야생 돼지로 바누아투의 상징이자 바누아투의 화폐에도 등장하는 유명인사다. 실제로 터스커를 보지는 못했지만 매일 저녁 터스커 스티커가 붙은 맥주를 마셨다. 탄자니아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된 하루를 마감하는 축하와 감사의 노동주였다.

     

어느 날은 심플한 감자튀김이, 또 다음 날은 쌀이 그리운 자들을 위한 중국음식(해외에 나가면 분명 이전보다 한식당이 많아지긴 했지만 중국식당의 존재감에 비하면 아직 갈길이 멀다), 또 어떤 날은 특별히 준비된 초대형 코코넛 크랩이 안주 겸 식사메뉴로 테이블에 올랐다. 일정은 빠듯했고, 해결을 기다리는 일들이 줄줄이 이어졌지만, 터스커 맥주를 마시던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다 잊고 맥주와 그 저녁 식사에만 집중했다. 근심 걱정을 안고 전전 긍긍해 봤자 맥주만 미근 해질 뿐이다.  

     

오늘처럼 햇볕이 뜨거운 한여름이면 바누아투에서 터스커 맥주를 마시던 저녁이 떠오른다. 하루 종일 무더위, 모기와 사투를 끝에 살아남아 먹게 되는 저녁 식사는 행복 그 자체였다. 세계 1위의 행복지수를 가진 나라, 바누아투! 그곳에서 나도 터스커 맥주 한 병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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