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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ug 07. 2019

생일에 맞춰 여행을 떠나는 이유

생일날에야 비로소 밝혀지는 출생의 비밀


모든 사람이 1년에 한 번은 맞이하게 되는 생일. 나도 피가 뜨거웠던 시절에야 생일이 오는 게 마냥 반갑고 즐거웠다. 늘 누군가의 조연 같은 내 인생이 유일하게 주연이 되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날 같았다. 그래서 일명 ‘생일 주간’이라 칭하는 기간 동안 연이은 생일파티로 에너지와 돈을 탕진하며 내가 평소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확인하곤 했다. 생일 파티의 횟수, 참석하는 사람의 숫자, 받게 되는 선물의 질로 나의 사회성과 인간관계를 돌아보곤 했다.


하지만 한해 한해 나이를 먹어 갈수록 생일이 왜 이리도 빨리 돌아오는 걸까? 게다가 나는 1월 초에 생일이 있기 때문에 새해가 되면 한방에 2살을 먹는 억울한 기분이다. 언젠가부터 생일에 대한 설렘도 기대도 희미해져 가는 나이이니 뭐 특별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365일 중에 하루일 뿐이라고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권태기에 빠진 연인처럼 생일이 되면 무기력하고, 지겨웠다. ‘분명 축하받고 행복해야 할 생일이 나는 왜 이렇게 싫어졌을까? 이번 생일은 좀 다르게 지내봐야겠다 ‘ 생각한 게 3년 전 생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비록 하루 전에 마음먹긴 했지만 야심 찬 계획을 하나 세웠다. 생각의 출발은 단순했다.


당시 엄마는 11월에 팔을 다치셔서 깁스를 두 달째 하고 계셨다. 겨울 내내 무척 답답해하고 우울해하시는 엄마님을 보고 있자니 짠한 마음이 차올랐다. 기분전환이 급히 필요했다.


그래 엄마와 함께 생일 기념 여행을 떠나자



내 생일에 엄마 모시고 여행을 간다 하니 주변에서는 아이디어 좋은 효녀라며 칭찬을 퍼부었다. 사실, 엄마를 위한 마음 반, 나를 위한 마음도 반이었다. 실제로는 효녀를 가장한 이기적인 딸임이 분명하다. 사실 생일은 핑계였고, 바다를 좀 보고 싶었고 눈도 좀 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손이 아픈 엄마께 미역국을 바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 손으로 미역국을 끓이기는 더더욱 싫었다. 여하튼, 그날 아빠는 다른 일정이 있으셔서 오붓하게 모녀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우리의 계획은 속초 1박, 강릉 1박. 숙소 예약을 제외한 아무 계획도 없이 우선 출발했다.


경기도에서 떠날 때만 해도 멀쩡하던 하늘이 백담사쯤 지나니 폭설이 쏟아졌고, 속초에 도착하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우산도 없었던 모녀는 흩뿌리는 1월의 비를 맞고, 점심으로 감자옹심이를 먹고, 닭강정을 포장해 와 오션뷰 호텔에 도착했다.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킹크랩으로 생일 만찬을 즐겼다. 호텔에 돌아와서도 맥주 한 병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모녀는 나란히 누워 이런저런 얘길 나눴다.  


그날 밤, 새롭게 하나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바로 나의 태어난 시(時)이다. 지금껏 나는 저녁 7시 30분으로 알고 자랐는데 엄마가 말해준 그날의 진실은 오후 5시 반은 넘은 때였다고 했다. 병원이 아닌 집에서 낳아서 정확한 분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언저리라고 엄마는 기억하신다. 엄마가 확신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엄마는 그날, 이날엔 애가 낳을 것 같은 촉이 왔다고 한다. 셋째쯤 되니 의사가 예정일을 알려주지 않아도 그냥 그럴 거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그래서 오후 늦게 목욕하고 준비를 한 후 마지막 저녁을 차리려고 동태찌개 물을 올리려는데 양수가 터졌다고 한다. 동태찌개를 끓이려던 물은 곧 태어난 나를 씻기기 위한 목욕물이 됐다고 한다. 저녁을 먹기 전, 저녁 식사를 준비하다가 낳은 거니 저녁 7시 반 일리가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아빠는 삼시세끼 제때 식사를 하지 않으면 세상에 큰일이 나는 줄 아는 밥돌이 시기 때문이다.
 
여하튼, 동태찌개 국물이 될 뜨거운 물로 씻겨 키운 딸내미는 어느새 훌쩍 커서 엄마가 나를 낳았던 나이보다 더 살았다. 그간 태어난 시가 저녁 7시 반인 줄 알고 살았기에 지금까지 봐온 사주가 다 나와 맞지 않았던 건가 화들짝 놀랐다. 재빨리 핸드폰 인터넷을 뒤져 확인하니 다행히 사주 볼 때 구분하는 태어난 시는 같은 시였다. 앞으로 동태찌개를 먹을 때면 이날 밤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풉 하고 웃게 될 거 같다. 그렇게 신묘한 출생의 비밀(?)을 하나 알게 된 생일의 밤은 긴 여운을 남겼다.



그래서 다음 해, 좀 더 과감하게 성대한 셀프 생일 기념 여행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아빠도 함께였다. 마카오 + 홍콩 + 코타키나발루를 이어지는 15일간의 여행 대장정. 그중에서도 내 생일은 첫 번째 여행지인 마카오에 머물던 날로 맞췄다. 한국에서부터 꼼꼼히 준비해 갔다. 우선 미역국은 먹어야 하니 뜨거운 물만 부으면 완성되는 간편 미역국을 캐리어에 넣었다. 생일 당일은 호텔 런치 뷔페를 예약했다. 식사 후에는 마카오의 대표적인 쇼 <하우스 오브 댄싱 워터>를 예매했다. 보는 재미, 먹는 재미 그리고 의미까지 3박자를 다 갖춘 나름 알찬 구성이었다. 내가 선택한 셀프 생일 만찬인 호텔 뷔페의 산해진미로 어느 정도 배가 채워졌을 때 즈음, 진한 밀크티와 달콤한 케이크들을 앞에 두고 궁금했던 이야기를 물어봤다.


왜 자식을 넷이나 낳았어?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홀몸으로 엄마와 이모를 키우시던 외할머니. 시절이 시절인지라 오래 견디지 못하고 엄마는 친척집에 보내져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단 한 명뿐인 핏줄, 이모와도 떨어져 외롭게 자라온 엄마는 늘 다복한 가정을 꿈꿨다. 그래서 먹고살기도 빠듯한 살림에 자식을 넷이나 낳았다고 했다. 7남매 사이에서 자란 아빠의 반대에도 엄마는 뚜벅뚜벅 마이 웨이를 택한 거다. 셋째 딸인 나는 여태껏 맏며느리인 엄마가 아들(=남동생)을 낳기 위해 그 고된 길을 가셨나 생각했다.
 
엄마의 소신(?) 덕분에 100원짜리 과자 하나도 먹으려면 남매들과 피 터지게 싸워야 했다. 그래서 그 어린 나이에 ‘약육강식‘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체험하며 자랐다. 적인 줄만 알았던 형제, 자매들이 계산 없이 내 편이 되어주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어른이 되고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래서 지금이야 이 세상에 나의 형제, 자매들이 있는 게 한 없이 든든하지만, 어릴 때 외동인 친구들이 부러웠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올해 생일은 일 때문에 딱 당일은 떠나지 못했지만 생일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가고시마로 여행을 떠났다. 모래찜질을 하고, 온천을 하고,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배를 타고 사쿠라지마에 도착해 족욕으로 몸도 마음도 노곤 노곤해질 때쯤 회심의 질문을 던졌다.

 

 내가 태어났을 때 어떤 사람이 될 거라 생각했어?

내 질문에 엄마는 나의 태몽 얘기를 꺼냈다. 아빠와 시골 할머니 댁 근처 풀밭을 걷던 중 검은 말 한 마리가 엄마에게 다가왔다고 했다. 검고 윤기 나는 긴 갈기가 탐스러웠던 말 한 마리... 주인도 없이 떠도는 말이 걱정된 엄마는 어찌해야 하나 고민했다고 했다. 이에 비해 아빠는 “주인도 없는 거 같은데 우리가 데리고 가지 뭐”라고 말한 후 말의 고삐를 잡아 집으로 데려갔다고 했다. 아빠의 박력 덕분에 난 이 가족의 구성원으로 태어나게 된 거다.


태몽 속 그 검은 말을 떠올리며 엄마는 말했다. “말처럼 세계 여기저기 잘 뛰어다니는 걸 보니 우리 딸 태몽이 맞긴 맞는 거 같아.” 검고 윤이 나는 긴 갈기... 사실 대학시절만 해도 상반신 뒷모습만큼은 전지현, 이효리 뺨치는 검고 긴 생머리의 소유자였다. 아마 그 말의 갈기를 닮아 나도 그 긴 생머리를 휘날렸던 걸까? 어쨌든 엄마 말대로 검고 윤기 나는 갈기를 가진 그 말처럼 앞만 보고 힘껏 내달렸고, 참 여기저기를 많이 돌아다녔다. 겁도 많고, 지구력도 떨어지지만 인간에게 중요한 가축 중 하나로, 전 세계에서 널리 사육되고 있는 말. 나도 개복치급으로 예민하고, 쉽게 지치지만 여기저기 적재적소에서 사회 구성원의 몫을 다하고 있으니 태몽이 마냥 허무맹랑한 개꿈은 아닌 듯싶다.



이렇게 생일에 부모님과 여행을 떠나게 되면 낯선 환경에서 나에 대한 낯선 이야기를 듣게 된다. 집에서였다면 물어보기도 어색하고 민망했을 이야기들을 생일이라는 핑계로 무심하게 꺼낸다. 내가 태어나기 전, 그리고 내가 태어나고도 기억할 수 없던 시절의 이야기를 부모님의 입을 통해 듣게 된다. 부모님을 제외하면 사실 나에게만 특별하고, 나에게만 의미 있는  그 이야기를 듣는 재미 때문에 나는 또 내년 생일 여행이 기다려진다. 내년에는 어느 곳에서 또 어떤 출생의 비밀이 밝혀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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