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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ug 14. 2019

흔한 관광 말고 덕지 순례 여행 - 시인 윤동주 편

시인 윤동주의 시비를 품은 일본 교토 도시샤 대학교


우리 땅 밖에서 가장 자주 그리고 오래 머문 도시를 꼽으라면 단연 일본의 교토다. 나를 아는 모든 것들로부터 숨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제일 먼저 교토로 나를 데려다 줄 비행기표와 숙소를 알아보던 시절이 있었다. 느리고, 단순하고, 차분한 교토 특유의 매력 때문에 너덜너널 해진 나를 종종 그곳으로 데려다 놓았다. 오사카에 들렀다 반나절 정도 둘러보고 오는 근교 도시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일 수 있다.


금각사, 은각사, 청수사, 기온 거리, 철학의 길 등 국내외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곳들을 뒤로하고 내가 교토에서 주로 찾는 곳은 볼 것 없는 고즈넉한 동네 골목과 청춘들의 열기 가득한 대학가다. 그중에서도 2014년 갔던 도시샤 대학은 시인 윤동주를 향한 덕심에서 출발한 목적지였다.



한글로 시를 썼다는 이유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혐의를 받았던 윤동주. 1943년 후쿠오카 형무소에 끌려가기 전까지 나라를 빼앗긴 허약한 청춘, 윤동주의 짧은 청년 시절이 도시샤 대학교에 알알이 박혀 있다. 간사이 지방의 4대 명문 중 하나라는 명성답게 캠퍼스에 들어서니 고풍스러운 건물들 사이에서 전형적인 모범생 스타일의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제 막 점심시간이 시작되는 때라 그랬을까? 학생들의 얼굴에는 생기와 설렘이 가득했다.



윤동주를 만나기 전, 먼저 배를 채우기로 한다. 외부인도 이용할 수 있는 학생식당으로 가서 쟁반 위에 음식이 담긴 접시들 올렸다. 종류별로 가격이 매겨진 접시를 한꺼번에 계산하는 시스템이었다. 욕심대로 골랐는데도 일반 식당의 절반 값이었다. 싸고 푸짐한 학생 식당의 매력을 흠뻑 빠져 의기양양 자리를 잡고 앉아 주위를 둘러봤다. 다른 학생들의 식판은 라멘, 우동 등 단출했다. 대식(大食)의 민족 후예는 쟁반의 빈틈이 보이지 않도록 꽉꽉 채운 음식들이 살짝 부끄러웠다. 하지만 입만 다물고 있으면 늦은 나이에도 학업의 끈을 놓지 않는 만학도 정도로 생각하겠거니 여기고 내 앞의 음식에 집중했다. 각종 음식 냄새와 학생들의 수다가 가득한 학생 식당 한가운데 앉아 생각했다.  


일제 강점기의 시인 윤동주가
21세기에 이 학교에 다녔다면
나처럼 이렇게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었겠지?
아니 유학 자체를 가지 않았으려나?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이제 본격적으로 윤동주를 만나러 간다. 교내를 간략하게 정리한 안내도를 살펴봐도 도무지 윤동주의 시비 위치를 알 수 없었다. 우리가 꼭 일어 까막눈이어서 그런 건 아니다. 먼저 다녀간 여행자들의 후기를 봐도 쉽게 찾기 어렵다는 말이 있었기에 길게 애쓰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다 친절해 보이는 여학생에게 조심스럽게 윤동주 시비의 위치를 물었다. 마침 오니기리를 오물거리며 설명하던 학생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바다 건너온 여행객을 끌고 직접 윤동주 시비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여전히 그녀의 손에는 먹다 만 오니기리가 쥐어져 있었다. 즐거운 점심식사를 방해한 거 같아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시인의 후배가 건넨 작은 친절에 진심을 가득 담아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오니기리 그녀가 떠난 후, 그제야 윤동주의 시비를 찬찬히 살폈다. 도시샤 대학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시비. 유심히 둘러보지 않으면 쉽게 지나칠 만큼 소박했다. 윤동주의 영면 50주년을 기념해 1995년 세워진 시비는 외롭지 않게 서 있었다. 시비 곁에는 앞서 다녀간 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꽃과 동전, 음료수 등이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시비 곁에는 플라스틱 파일 안에 시인을 추모하는 방명록과 펜이 담겨 있었다. 방명록 안에는 한국과 일본 양국 사람들의 윤동주를 향한 먹먹한 그리움이 가득했다. 하나하나 천천히 읽어 보다 주책없이 울컥하고 눈물이 차올랐다.


번지려는 눈물을 재빨리 닦고 한국에서부터 챙겨간 한라산 소주를 시비 앞에 놓았다. 시인이 생전에 술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시내에서 영화를 본 날이면 중국집에서 한잔하기도 했는데 술에 취해도 남의 뒷담화 한 일이 없었다는 일화를 남긴 윤동주. 이 일화를 알게 된 후 술을 못하지는 않겠구나 싶어 챙겨간 한국의 소주였다.


난 그저 그가 그리도 바랐던 해방된 조국의 땅과 물, 그리고 바람이 담긴 소주 한 병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소주를 잘 못 마시는 알코올 쓰레기지만 잠시 상상했다. 마주 앉아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시며 조용히 시인과 이야기하는 나를...   


지금 지내는 곳은 어때요?

여전히 산책도 즐겨 하나요?

거기서도 시를 쓰고 있나요?

후세대들에게 백석, 임화, 황순원과 함께
조선 문학계의 4대 문인 아이돌로 꼽히고 있는데 기분은 어떤가요?  

무엇보다 지금의 조국은...
당신이 바라던 모습인가요?


시비를 앞에 두고 한참을 멍하니 혼자 나만의 상상에 젖었다. 머릿속에서 제 멋대로 만든 상상이기에 가능했을 덧없는 질문들도 끝이 보일 때쯤 지루했던 동행자가 소매를 이끈다. 서둘러 일어설 채비를 하고 마지막으로 한 번 시비를 지긋이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요.
그리고 우리를 너무 걱정하거나
그러진 말아요.
그곳에서는 고뇌의 시 대신
기쁨의 시, 희망의 시를 짓는 날들이
더 많기를 빌어요



시비를 뒤로하고 캠퍼스를 나왔다. 그리고 가모가와 강(江)으로 향했다. 시인이 하숙집과 학교를 오가던 길이었다는 그 강변을 걸었다. 9월이었지만 엉덩이 무거운 여름은 아직 떠나지 않았고, 가을은 아직 저 멀리서 오는 중이었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여유롭게 늦은 여름을 즐기고 있는 교토의 청춘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조국이 조선이 아니었다면? 청년 윤동주도 저들 사이에서 저렇게 걱정 없이 빛나게 웃고 있었겠지? 나라 잃은 슬픔과 시대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긴 시인 윤동주의 흑백 사진 속 그 아련한 미소가 가슴속에 아프게 박혔다.
 


+ 당시에는 별도의 안내가 없었는데

최근 다녀온 분들의 후기를 보니

지금은 추모 후 헌정 물품은

회수해 달라는 안내가 있다고 한다

혹시 가시는 분들이 있다면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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