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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ug 27. 2019

할머니 손맛에 대한 환상이 담긴 사골 칼국수 한 그릇

양평동 선유도역 근처 <이가네 손칼국수> 탐방기  


우리 할머니는 평생을 충청도 산골의 촌부로 살았다. 하지만 그 시대의 여성들이 그런 것처럼 억척스럽지도, 억세지도 않았다. 억척스러움은 할아버지의 몫이었고 할머니는 늘 집 안팎을 쓸고 닦는 일에 열중하셨다. 그 외의 시간은 쪽진 머리를 곱게 단장하거나, 대접에 믹스커피를 타서 마신 후 누워계셨다. 밭일도, 소의 먹이가 될 풀을 베는 일도 할머니와는 상관없다는 듯 외면하셨다. 어린 나의 눈에도 할머니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공주구나 싶었다.  


그 시절의 초등학생들이 다 그렇듯 우리 남매들은 방학이 시작되면 당연히 시골 할머니 댁에서 지내야 했다. 장사하느라 바쁜 엄마 아빠를 대신해, 방학 동안 보호자가 되어 주셨다.  보통 할머니 집에 가면 상이 모자랄 듯 차려내는 푸짐한 집밥이 떠오르겠지만 우리 할머니는 달랐다. 청소하는 것에 비해 음식 만드는 것은 영 관심도, 솜씨도 없으셨다. 본인이 기름진 음식을 싫어하시기에 늘 상에 오르는 것은 기름기 없는 채소반 찬 뿐이었다. 시골 할머니 댁에서 지내다 방학이 끝날 무렵 집으로 돌아온 바짝 마른 우리를 본 엄마는 늘 이렇게 말했다.

왜 할머니 집에서 피죽도 못 얻어먹었어?


만약, 우리 할머니의 손맛이 좋았다면 이런 맛을 그리워하고, 추억하진 않을까? 싶은 음식을 서울 한복판, 양평동 작은 골목에서 만났다. 얼마전 근처에 볼 일이 있어 선유도역 근방을 배회했다. 점심을 먹기 위해 먹을 만한 음식점을 찾다가 간판 사진을 보고 두 번 고민하지 않고 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이제는 신축 아파트와 빌라가 빽빽하게 들어선 골목 깊숙이 들어가면 서울에 이런 곳이 있나 싶을 정도로 오래된 간판을 내건 세탁소, 중국집이 하나둘씩 고개를 내민다. 예전에는 공장과 정비소가 많았다는 동네라 그런지 땀 흘리는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한 저렴하고 푸짐한 음식점들이 몇몇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중 <이가네 손칼국수>는 사골 칼국수로 명성이 자자한 20년이 넘은 음식점이다.  


외관부터 느껴진 심상치 않은 포스가 내부에도 이어진다. 하도 닦아서 하얗게 벗겨진 바닥과 테이블, 인삼과 사슴이 그려진 옛날 스타일 수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손으로 쓴 메뉴판... 무엇보다 직원 한 명 없이 혼자 한 여름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칼국수를 끓이고 있는 뽀글 머리 주인 할머니의 아우라가 모든 것을 압도한다. 점심 피크가 지난 한적한 시간임에도 테이블은 반쯤 차있다. 대부분이 혼자 온 손님이고 누가 오든 눈을 돌리지 않고, 각자 자기 앞의 칼국수에만 집중하고 있다.


뜨내기손님인 나도 그 속에 파고들어 한자리를 잡았다.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5000원짜리 칼국수를 시켰다. 곧이어 빛깔 고운 자태의 겉절이와 잘 익은 섞박지, 그리고 고추 다진 양념 삼총사가 테이블에 차려졌다. 초심자답게 칼국수가 나오기까지 두리번거리며 주변 분위기 탐색에 나섰다.


단골인 듯한 아저씨는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앉기도 전에 “수제비요”라고 말했다. 이에 주인 할머니는 별도의 인사도, 눈 마주침도 없이 팔팔 끓고 있는 냄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답한다. “수제비 떨어졌어. 칼국수 먹어.” 이 정도면 요즘 말로 저 세상 시크함이다. 이것이야 말로 손님과 주인 사이, 시간과 신뢰가 쌓여 만든 ‘코리안 티키타카(짧은 패스를 빠르게 주고받는 축구경기 전술. 사람들 사이에 합이 잘 맞아 빠르게 주고받는 대화라는 뜻으로도 쓰임)’가 아닐까?
 
때마침, 식사를 마치고 나가려는 손님이 멋쩍게 웃으며 주인 할머니께 돈을 건넨다. 이곳의 룰은 카드는 사절, 오직 현금만 통용된다. 5만 원짜리인데 괜찮겠냐는 손님의 말에 할머니가 “오늘 다 왜 이래? 다 5만 원짜리만 내. 잔돈이 없어!”라고 난색을 표하신다. 그러자 아까 수제비 먹으러 왔다가 졸지에 칼국수를 드시게 된 손님이 지갑을 뒤져 돈을 바꿔 주신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닌 듯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손님과 주인 할머니가 만들어 내는 일상 시트콤을 넋 놓고 보고 있으니 어느새 칼국수가 내 테이블에 올라왔다.



커다란 스테인리스 냉면 그릇 가득 담긴 뽀얀 사골 육수와 푸짐한 칼국수 면. 그리고 그 위에는 파와 김가루가 패기 넘치게 뿌려져 있다. 우선 칼국수를 휘져 고명과 국수가 섞이게 한 후 국물부터 한 수저 떠서 입에 넣었다. 공장제 사골 육수가 풀메이크업이라고 한다면, 양평동 할머니의 사골 육수는 청순 메이크업 정도랄까? 누린내 하나 없는 것은 당연했고,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밸런스 좋은 사골 국물이었다. 주방 한 켠에서 핏물을 빼고 있는 뼈들이 아마 내일 이 국물로 변신할 것이다.


이제는 면 차례. 가게에서 반죽한 면을 기계로 뽑아낸 면은 도톰한 두께 덕분에 사골 육수를 충분히 머금고 있었다. 익힘 정도는 너무 퍼지지도, 너무 딱딱하지도 않게 면 자체의 탄력이 제대로 느껴졌다. 순정의 맛을 제대로 즐겼으니 김치를 얹어 봤다. 매일 아침 직접 만든다는 고춧가루 색이 유독 곱던 겉절이는 아삭함이 제대로 살아 있는 여름 김치였다. 땀을 많이 흘리는 노동자들이 주 타깃이어서 그런지 간간한 칼국수와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겉절이는 좀 심심한 편이었다. 싱그러운 겉절이에 비해 섞박지는 푹 익어 칼국수에 곁들이니 풍미가 한층 짙어졌다. 반쯤 남았을 때는 맛의 변주를 시도했다. 고추 다진 양념을 섞어 매콤하고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원래는 남은 국물에 무료 제공이라는 밥까지 말아먹어야 완벽한 마무리지만 칼국수만으로도 내 배는 이미 한도 초과였다. 사골 칼국수 한 그릇을 순정으로, 김치를 곁들여, 고추 다진 양념을 섞어 총 세 가지 버전으로 즐기고 나니 근사한 코스요리를 먹은 듯 몸도 마음도 든든해졌다.   


첫 대면한 양평동 할머니의 사골 칼국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할머니의 음식’하면 기대하는 모든 면모를 고루 갖췄다. 화려한 플레이팅이나 세련된 꾸밈없지만 정직하고 푸짐한 맛과 양. 게다가 단골 손님과 주인 할머니의 시트콤 st 티키타카를 보는 맛은 덤이다. 사골 칼국수 하나 먹겠다고 굳이 찾아갈 필요까진 없겠지만 막연히 (친할머니는 아니지만) 할머니의 음식이 그립거나, 양평동을 지나갈 때 칼국수가 땅긴다면 들려 봐도 좋을 곳임은 분명하다. 찬바람이 불면, 생각날 그 맛. 가을이 좀 더 깊어지면 헛헛한 몸과 마음을 채우러 난 다시 양평동으로 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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