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짧아 걸어 사람들아 (※ 서울 위주 주의)
1년 중 걷기 가장 좋은 계절, 가을이 왔다. 걷기 중독자는 이맘때면 1분 1초 가는 게 아깝다. 늑장 부리며 다음으로 미루기엔 참을성 없는 가을은 우리를 오래 기다려 주지 않는다. 가을이 되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모자를 눌러쓰고,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냉큼 밖으로 나선다. 하늘은 끝없이 높고 적당히 따가운 햇볕과 습기 없이 보송한 바람이 얼굴에 부딪힌다. 하늘 아래 같은 색조가 없듯, 시시각각 다른 색을 뽐내는 나뭇잎들의 배웅을 받으며 걷는다. 가을에 걷기 딱 좋은 서울의 길들을 소개한다.
뭐하세요? 가을인데 우리 함께 걸어요
100년은 훌쩍 넘은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나이테 두툼한 가로수가 늘어선 서울 시청 인근 덕수궁 옆 정동 돌담길은 사계절 모두 각기 다른 매력을 품고 있다. 하지만 그중 정동 돌담길의 제대로 만끽하고 싶다면 ‘가을’이 제격이다. 정동 돌담길은 많은 이야기를 품은 길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연인이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이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자리에 대법원과 서울 가정법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혼을 하러 법원을 찾는 부부들이 이 길을 지난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고, 돌담길이 이어지지 않고 끊어진 데서 유래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설은 설일뿐, 이제 정동 돌담길엔 법원도 사라진 지 오래고, 끊어졌던 돌담길도 지난해 12월, 59년 동안 막혔던 길이 뚫려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정동 돌담길의 매력을 처음 알게 된 건 10년도 훨씬 더 지난날들의 얘기다. 그때는 1만 원이면 3편의 영화를 연이어 틀어주는 심야 극장이 정동에 있었다. 금요일 밤, 마라톤을 하듯 심야 영화 3편을 연달아 본 후 집으로 가기 위해 기지개를 켜며 극장 밖으로 나왔다. 지하철 첫차를 타기 위해 정동 끝에서 시청역까지 걸어가던 가을 아침. 새벽 도시의 정적을 깨우는 건 환경미화원들의 빗자루 소리였다. 그런데 그들은 깨끗이 바닥을 쓰는 게 아니었다. 쓰레기는 줍고, 노란 은행잎을 돌담길 곁으로 가지런히 모아두었다. 겨울을 앞두고 도토리를 모아두는 다람쥐의 부지런함이 담긴 비질이었다. 딱딱한 건물에 갇혀 사는 도시인들이 오며 가며 잠시라도 가을을 만끽하라는 그들의 배려 넘치는 마음이 느껴졌다. 조심조심 그 은행잎을 밟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이름이 ‘은행‘잎이어서 그런 걸까? 아님 노란 금화를 닮아서일까? 가득 쌓인 은행잎은 보기만 해도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때의 기분 좋은 기억 때문에 가을에 사람을 만날 때면 무조건 ‘정동 돌담길’을 약속 장소로 잡곤 한다. 또 때로는 밤샘 후 퇴근길에 체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서대문에 내려 굳이 정동을 거쳐 시청역까지 걸어가곤 했다. 단풍철이 되면 평일, 주말 상관없이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지만 새벽만큼은 정동 돌담길을 오롯이 내가 그곳을 전세 낸 것 같은 기분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처럼 새벽에 가는 건 무리겠지만, 사람 바글바글한 오후보다는 오전을 택한다면 정동 돌담길의 매력을 좀 더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팁 하나를 더하자면 몇 해 전 개방한 서울시청 서소문청사 13층에 위치한 <정동 전망대>!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정동길과 덕수궁의 풍경은 계절과 인간이 합작한 예술품 그 자체다.
서울의 대표적인 벚꽃 명소인 안양천 둑길은 석수역에서 안양천, 한강을 따라 가양대교에 이르는 길이다. 가을이 되면 벚꽃이 떨어진 자리에 낙엽이 가득하다. 유모차나 휠체어는 물론 맨발로도 걸어 다니는 사람이 종종 보일 만큼 불편함 없는 ‘착한 길’이다. 안양천 걸어가다 보면 둑 양쪽에 심어 놓은 각종 식물들을 계절에 따라 모두 즐길 수 있다. 안양천을 집 삼아 살고 있는 각종 새들, 억새와 갈대의 일렁임, 버드나무의 춤사위를 유심히 관찰하며 걷다 보면 춤과 노래, 웃음이 담긴 한 편의 버라이어티 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기분이다.
벚꽃비가 내린 지 6개월이 지나면 단풍터널이 생긴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빽빽한 나뭇잎들이 붉은빛으로 물들면 하나 둘 떨어지면 가을이 깊었다는 얘기다. 고작 6개월 전에 꽃이 피었다고 반가워했는데, 6개월 사이에 꽃이 떨어지고 잎이 돋아나고 다시 잎이 져 버린다. 떨어져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으며 걷다가 생각한다. 나의 지난 6개월은 어땠었나? 봄처럼 설렜고, 여름처럼 뜨거웠고, 또 가을처럼 스산했다. 수확의 계절이라는 가을에 어쩐지 빈손인 것 같아 가슴 한편이 헛헛하다. 그래도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어서 곧 안양천의 가을을 만끽할 수 있을 테니 빈 것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나는 올 가을 또 안양천을 걸을 것이다.
과거 한강은 실연당한 자들이나 실패한 자들이 강소주를 들이켜던 슬픔과 괴로움이 응집된 장소였다. 하지만 2019년의 한강은 다르다. 액티비티, 피크닉, 캠핑 등 즐거움의 공간으로 변신했다. 비(非) 서울인 나에게 한강은 서울의 상징이자, 성공의 또 다른 이름처럼 느껴진다. 강변을 따라 늘어선 한강뷰를 품은 빌딩과 집들은 평생 나와는 거리가 먼 다른 차원의 공간들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한강은 품이 넓어 부자도, 가난한 자도, 취준생도, 은퇴자에게도 다 열려 있다. 특별한 준비물도, 비용도 들지 않고 그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한강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걷기‘다.
노을이 무르익을 무렵, 말끔하게 정비된 강변을 타박타박 걷기 시작한다. 강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을 만끽하고, 갈대들이 스치며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하나 둘 빌딩에 불이 들어온다. 비로소 한강 걷기의 매력 최정점에 오른다. 강변을 따라 은하수처럼 수 놓인 빌딩의 불빛과 도시의 야경은 몽환적인 풍경을 만든다. 그 사이를 유영하듯 걷다 보면 잠시 우주에라도 다녀온 기분이다. 발은 분명 땅에 닿아 있지만, 기분이 붕하고 떠오른다. 사실 프로 야근러들의 땀과 눈물이 별처럼 박힌 야경이라는 걸 알지만, 내가 야근을 안 할 때만큼은 그런 현실 따위 잠시 잊고 한강을 즐기고 싶다.
한강의 걷기 코스 중 내가 제일 사랑하는 코스는 상암동 하늘공원 메타세쿼이아 길에서 시작해 망원지구를 지나 선유도 공원까지 걷는 길이다. 메타세쿼이아 숲의 이국적인 분위기와 한강의 시원한 풍경을 모두 만끽할 수 있다. 걷다 지치면 강변 편의점에서 맥주를 한 캔 사서 빨대를 꼽고 앉아 쪽쪽 들이킨다. 어차피 한강에 운동하러 온 게 아니니 살찔 걱정 따위 접어 둔다. 시원한 가을 강바람을 안주 삼아, 마시는 맥주는 술이 아니라 약이다. 지친 심신을 위로하는 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