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내 여행 지수가 바닥을 보일 때면 공항에 간다
공항 가는 길은 사람을 묘한 감정에 휩싸이게 만든다. 빠뜨린 건 없는지, 수화물 무게는 초과하지 않을지, 제시간에 도착할지 등등 적당한 긴장과 설렘이 버무려져 공항으로 가는 시간 내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그런데 이번만은 달랐다. 제대로 떠날 수 있을지에 대한 긴장감도, 묵직한 캐리어도, 여행자의 필수품 여권도 없이 가볍게 공항으로 향했다. 대신 작은 에코백에 와인 한 병과 돗자리를 넣었다.
이번에 가는 공항은 떠나기 위한 출발점이 아닌 오직 목적지였다. 이런저런 상황과 사정 때문에 (아마도) 당분간 비행기 탈 계획이 없는 지인들을 모아 인천 공항과 인근의 바닷가로 당일치기 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일행들과 잡은 약속 시간보다 좀 일찍 공항에 도착했다. 쫓기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평소에도 공항에는 여유롭게 도착하는 편이다. 이번에는 좀 더 다분히 의도적인 목적을 갖고 일찌감치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출국장 앞쪽 벤치에 자리를 잡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느긋하게 관찰했다. 내가 떠나는 사람이 됐을 때는 시간과 상황에 쫓겨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떠나는 설렘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표정과 극명히 대비되는 건조한 표정의 상주직원들, 노트북 가방을 맨 칼 주름 잡힌 슈트를 빼입은 비즈니스 우먼, 할아버지부터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손녀까지 함께 하는 3대 가족여행을 떠나는 왁자지껄한 가족, 자신의 몸보다 더 큰 짐들을 바리바리 챙겨 한국생활을 정리하고 귀국길에 오르는 외국인 노동자, 알록달록한 시밀러 룩을 입고 단체사진을 찍던 우정 여행족, 캐리어와 가방 가득 각종 굿즈로 치장한 케이팝 덕후 여행자, 깊게 팬 주름 사이로 여행의 설렘이 스며들어 있던 황혼의 여행 커플, 여행이 아닌 유학 또는 이주 때문인지 가족들과 한 명씩 눈물 담긴 긴 포옹을 하던 어느 청춘의 뒷모습까지... 떠나는 이유도, 목적지도 달랐던 그들의 모습에 나를 대입해 상상해 봤다.
나도 떠날 때, 저런 표정이었을까?
나도 떠나보낼 때, 저런 표정이었을까?
나도 일할 때, 저런 표정이었을까?
관찰 겸 상상 놀이가 지루해질 때 즈음,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지하의 <띵크 커피>로 갔다. 평소라면 출국 수속을 서둘러 마치고, 면세구역에 들어가 습관처럼 스타벅스에 갈 나였다. 탑승구 앞 의자에서 스벅 커피를 마시며 복잡하고 까다로운 출국의 관문을 무사통과하는 것을 자축하는 게 나의 습관이다. 하지만 이번엔 여권도, 비행기 티켓도 없이 공항에 왔으니 선택지는 좀 더 많아졌다. 지하라 뷰는 별로지만, 진한 커피가 먹고 싶어 택한 곳이 <띵크 커피>다. 그곳에 주문을 받는 직원을 제외하면 한국인은 1명도 없고, 모두 외국인 뿐이었다. 공항리무진을 타느라 서두른 탓에 못 먹은 아침을 대신해 라테와 베이글을 시켰다. 외국인 가득한 카페에서 베이글과 커피를 먹고 있으니 잠시지만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와 아침을 먹는 기분이 들었다. 뉴욕의 어느 지점을 그대로 재현한 분위기 덕분인지 가보지도 않은 뉴욕에 와 있는 착각을 할 뻔했다. 그곳에서 누군가의 여행기를 담은 책을 읽고 있으니 완벽하게 여행을 떠나온 기분이 마일리지처럼 차곡차곡 쌓였다.
그렇게 나만의 완벽한 시간을 보낸 후 드디어 시간이 됐다. 지인들과 약속한 시간에 맞춰 내가 인천공항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소로 향했다. 출발층에서 한층 더 올라가면 4층에는 전문 식당가가 있다. 그 사이로 쑥 들어가면 한옥 스타일로 꾸며진 정자가 있는 한국문화거리가 있다. 그곳은 큰 창 너머로 활주로가 한눈에 보이는 숨은 뷰 맛집이다. 예전보다야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비교적 여유롭게 공항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다. 나는 보통 공항에 일찍 도착해 수화물을 붙이고 나면 이곳에서 잠시 머무르며 숨을 고르곤 한다. 이번에는 당일치기 여행의 동반자들과 함께 하기로 했다. 다들 공항을 적지 않게 왔던 반프로 여행자들이었음에도 이곳은 처음이라고 했다. 공항 안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고 했다. 보통의 여행자들이 그러하듯 떠나기에 급급해 공항의 이곳저곳을 둘러볼 생각의 여유가 없었다고 했다.
각자 차 한 잔씩 앞에 두고 한옥 정자 언저리에 둘러앉았다. 초반에는 창밖 활주로를 보며 떠나지 못하는 아쉬움과 다음 여행에 대한 기대를 담은 수다를 떨었다. 하지만 곧 토크 주제는 원래의 제자리를 찾았다. 일, 사랑, 생활, 꿈, 돈, 미래 등등 다방면의 얕고 하찮으면서도 진중한 수다가 오갔다. 공간적 배경만 공항이었을 뿐 기존의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연남동 귀퉁이든, 종로 뒷골목이든, 상암의 카페든 어디서도 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심을 먹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쯤 여행 동반자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여기가 공항이라 그런가?
별 시답지 않은 얘길 해도 뭔가 설레!
이게 바로 공항 매직인가 봐
다음 코스는 간단했다. 공항을 한 바퀴 둘러본 후 자기 부상 열차를 타고 용유역에 내려 바닷가를 좀 걷고, 해물칼국수를 먹었다. 다시 좀 걸어 소화를 시킨 후 마시안 해변의 해송 그늘 아래 돗자리를 편 후 와인을 마셨다. 바닷가에서 음악을 작게 틀어 놓고 한가롭게 낮술을 하며 수다를 떨었다. 와인은 단 두 병뿐이라 일찌감치 술은 떨어졌지만 해가 서해 바다로 떨어지기 직전까지 우리의 수다는 길게 이어졌다.
사실 가기 전까지 그 거리를 가늠할 수 없어서 큰마음을 먹고 출발했다. 하지만 서해 바다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서울을 기반으로 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마음의 거리가 가까운 곳의 바다를 알게 되었다는 게 이번 여행의 큰 수확이다. 물론 이 바다를 가기 위해서는 인천 공항은 디폴트다. 꼭 멀리 떠나는 것만 여행은 아니다. 떠나는 기쁨 자체를 누리고 싶다면 많은 돈과 시간을 들이지 않고, 인천 공항으로 떠나는 것도 분명 하나의 방법이다. 그래서 언제든 체내 여행 지수가 바닥을 보일 때면, 난 가볍게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공항버스에 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