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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Nov 16. 2019

우리가 여행을 하는 방법

없는 게 많은 프리랜서들은 이렇게 여행합니다



평일 늦은 오후, 단체 카톡 방에 알람이 울렸다.


내일 올레길 걸을 사람?


발신자는 K였다. 그녀는 일 때문에 며칠째 제주에 머물고 있었고, 내일이면 그 일이 끝나는 날이었다. 같이 내려왔던 프로젝트 팀원들은 모두 내일 서울로 올라갈 계획이었고, 프리랜서인 K는 며칠 더 지내다 간다고 했다. 톡을 확인하고 잠시 고민했다. 올레를 걸으려면 하루는 온전히 제주에 있어야 했다. 다행히 내일은 회의가 없지만 모레 오전에 회의가 있다. 그 회의 시간에 맞추려면 새벽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겨우 24시간뿐이었다. 잠시 머릿속에 계산기를 두드리다 결국 Go를 택했다. 노트북을 짊어지고서라도 가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 마지막으로 제주에 갔던 게 벌써 1년 반 전이었다.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제주에 갈지 모르는 일이다.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
  
난 더 이상 불확실한 다음을 기약하는 일은 하지 않는 사람이다. 마음을 먹자마자 카톡 방에 동참 선언을 하고 재빨리 표를 알아봤다. 마침 짬이 났던 H도 동행하기로 했다. 제주에 가기로 마음먹은 게 오후 2시. 비행기 표와 숙소를 결제한 게 오후 5시. 제주행 비행기를 탄 게 저녁 8시. 다음날은 오롯이 올레길을 걷고, 전망 좋은 카페에 가서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한라산 소주를 곁들여 근고기를 먹었다. 숙소로 돌아와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난 두세 시간쯤 눈을 붙인 후 새벽 7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남은 두 사람은 반나절을 더 있다 오후 비행기로 올라왔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미리 예약해 둔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내내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왕복 항공권 가격 보다, 새벽 공항행 택시비가
더 나오는 여행을 하는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겨우 24시간 있자고 제주에 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런 여행을 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우리의 여행은 이런 식이다. 철저한 준비, 계획보다는 가고 싶다는 마음, 갈 수 있는 상황인가? 가 여행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남들이 보기에 이렇게 즉흥적으로 여행을 가도 되나 싶게 여행을 가곤 한다. 4명이 각자 출국도, 귀국도 달랐던 스페인 여행도 그랬고, 떠나기 3일 전에 결정한 크리스마스 기념 도쿄 여행도 그랬다. 소속도 없고, 챙겨야 할 남편이나 아이도 없고, 돈도 없는... 한마디로 없는 게 많은 프리랜서라 가능한 상황이라는 걸 안다.


스케줄은 들쑥날쑥하고, 당장 일주일 후, 한 달 후 내 인생이 어떻게 가고 있을지 예측할 수 없는 하루살이처럼 산다. 오늘은 뜨겁게 일하고 있지만, 당장 내일은 손가락을 빨아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소속이 없으니 내가 내 몸을 움직여 일을 하지 않으면 그 어느 곳에서도 돈 나올 구석은 없다. 또 내가 내 권리를 요구하지 않으면 그 어느 곳에서도 나를 보호해 주지 않았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프리랜서(freelancer)의 Free가 [자유로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통제나 구속을 받지 않는] 정도로 알고 있을 테지만 현실은 [무료의], […이 없는]의 의미가 더 강하다.


한때는 이런 현실이 싫어 프리랜서가 아닌 일반 직장에 들어가 제2의 인생을 시작해보려 도전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사회생활의 전부를 프리랜서로 살았기에 틀에 박힌 지루한 생활을 오래 견디지 못하고 다시 프리랜서로 돌아왔다. 자유와 안정, 둘 다 가질 수는 없는 게 인생이다.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는 게 프리랜서의 숙명이다. 완벽한 먼 미래를 기약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몇 번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의 삶을 즐기는 방법을 하나 둘 찾기 시작했다. 이번 제주 여행처럼, 기회가 있으면 악착같이 잡았다. 돈과 시간의 여유가 좀 더 있을 때라는 환상은 내 인생에 없다는 걸 안다.


오전부터 올레길을 걷고 늦은 오후, 미리 봐 뒀던 전망 좋은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오랜만에 올레길을 걸어 뻐근해진 다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불과 24시간 전에 우리가 제주에 있을 거라 상상이나 했어?
미쳤지. 누가 이렇게 여행을 해?
그래도 이렇게 함께 걸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서로에게 얼마나 다행이야
맞아. 서로의 불씨가 되어 준 거지. 의지를 활활 타오르게 해 준 불씨.
 
우리는 넘치는 돈도 없고, 뜨거운 열정도 없고, 화려한 커리어도 없고, 안정적인 직장도 없고, 든든한 남편도 없고, 사랑스러운 아이도 없다. 있는 거라고는 넘치는 나이와 직업병인 거북목, 그리고 약간의 경험...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에게 자극과 원동력이 되어줄 불씨 같은 친구가 있다. 다 가질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마냥 다 잃는 것만 있는 게 아니라서 공평한 게 인생이 아닐까? 없다고 비교하고 동동거리기보다, 무엇이든 있는 것에 감사해하며 살기로 했다. 누군가는 정신승리라 말할 것이다. 인정한다. 이 정신승리라도 하지 않으면 맨 정신으로 버티기 힘든 날들이다. 나는 불평, 불만, 원망으로 창창한 내 하루하루를 낭비하는 것보다 이해하고 인정하며 살기로 했다. 내 삶의 원동력이 되어줄 작은 불씨들을 소중하게 챙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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