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사 Jan 14. 2020

시장 골목에서 만난 할마에표 K-패스트푸드

제주 서귀포 매일 올레시장 <금복식당> 방문기    

 
프로젝트를 끝내자마자 계획했던 일을 실행에 옮겼다. 지난겨울, 괴롭고 힘들 때마다 이 순간만을 생각하며 버텼던 그 일 말이다. 그간 나를 괴롭히던 전화, 카톡, 회의, 변덕, 돌발변수, 수면 부족, 고나리, 스트레스, 갑질, 오지랖, 의견 충돌, 회피 등등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되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호텔에 틀어박혀 잠을 자는 일. 비행기 표를 끊고 제주도로 내려가 서귀포의 작은 호텔로 스스로를 감금시켰다.


체크인을 하자마자 사각거리는 감촉의 새하얀 침구가 깔린 침대에 몸을 내던졌다. 그리고 얼마나 잤을까? 배가 고파 눈을 떴다. 뭘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모자만 하나 푹 뒤집어쓰고 호텔 근처의 <서귀포 올레 시장>으로 향했다. 잔뜩 설렌 관광객들로 가득한 시장에서 먹을 만한 걸 찾아 헤맸다. 유명하다는 흑돼지 꼬치, 우도 땅콩 만두, 꽁치김밥, 천혜향 주스, 딱새우회 등등 관광객들의 취향을 저격한 사진발 잘 받는 인스타 갬성 먹거리들이 가득했다. 어수룩한 육지 것들을 타깃으로 한 때깔 좋은 음식들은 선뜻 내 지갑을 열지 못했다.


길 잃은 미아처럼 복잡한 시장 한가운데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배는 고픈데 왜인지 저 음식들로 배를 채우고 싶진 않았다. 서울, 강릉, 전주, 여수, 부산 등 뜨내기 관광객들이 모이는 전통시장 음식 특유의 영혼 없음에 여러 번 실망했기 때문이다. 지도 어플을 켜서 근처에 먹을 만한 백반 식당을 찾았다. 시장 골목 한구석, 상인들을 위해 점심때만 반짝 장사를 한다는 오래된 백반집이 물망에 올랐다. 연세 많은 할머니가 운영하기 때문에 메뉴도 단출하고, 친절한 서비스는 기대하지 말라는 후기가 나를 묘하게 자극했다.


시장 한 귀퉁이의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오래 키운 무성한 화초들이 반겨주는 오래된 단층 건물이 나온다. <금복 식당>이라는 투박한 폰트의 식당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불투명한 시트지로 전체를 가려 놓은 유리 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대한 거실 같은 실내가 나온다. 신발을 벗고 올라가 앉아야 하는 좌식 테이블로 가득하다. 혼자 혹은 둘, 셋 정도 되는 청년, 아주머니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식사에 집중하고 있다.


입구의 오른쪽에는 주방이 딸려 있고, 큰 싱크대가 식당 한편을 차지하고 있다. 그곳에는 고수의 포스를 풍기는 할머니 마에스트로, 할마에가 계신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처럼 일사불란하게 주름 가득한 손으로 여러 개의 반찬을 작은 종지에 담아 쟁반에 올렸다. 주방에서 건넨 달걀 프라이를 얹은 밥을 받으면 할마에는 방금 들어온 손님을 향해 외친다.


밥 나왔어요 가져가세요


이곳의 메뉴는 딱 두 개. 보리밥과 비빔밥. 가격은 3000원 동일하다. 따로 보리밥을 언급하지 않으면 당연히 비빔밥이 나온다. 처음 이곳에 온 어설픈 육지 것에게는 몹시 당황스러운 한국식 패스트푸드 시스템이지만 동공 지진을 멈추고 할마에의 지휘에 몸을 맡긴다. 배식을 받는 것 처럼 내 몫의 음식이 차려진 쟁반을 들고 와 내 자리에 앉는다. 방금 전까지 난로 위에서 몸을 데우던 묵직한 무쇠 주전자의 차를 따라 한 모금 마신다. 본격 식사를 위한 완벽한 워밍업이다.


널찍한 냉면 그릇에 담긴 보리밥을 비비며 쟁반 위의 반찬들을 스캔한다. 맑은 콩나물국, 양파 장아찌, 멸치 육수에 푹 끓인 배추 우거지, 무말랭이, 새콤달콤한 배추 절임, 양념을 얹은 잘게 자른 미나리, 달콤하게 졸인 강낭콩, 갓 밭에서 따온 싱싱하고 고소한 봄동 잎과 손수 담근 된장까지 작지 않은 쟁반을 가득 채울 반찬들이었다.


반찬을 스캔하는 사이, 비빔밥이 다 비벼졌다. 한입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밥보다 채소가 더 많이 씹혀서인지, 어금니 끝에서는 연신 아삭아삭 소리가 퍼져 나왔다. 그 소리에 맞춰 살짝 데친 숙주나물, 잘게 썬 배춧잎, 꼬들꼬들한 말린 표고버섯볶음이 입안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버라이어티 한 식감의 식재료들이 씹는 재미를 더해줬다. 특히 일반 고추장이 아니라 덜 짜고 덜 맵게 만든 특제 고추장 소스 덕분인지 지금까지 먹던 흔한 비빔밥의 맛과는 달랐다.


메뉴 구성에도, 서빙에도 드러나던 할마에의 꼬장꼬장한 성격은 음식에서도 느껴졌다. 불필요하고 과한 것 하나 없이, 단출하지만 각자의 맛을 제대로 살린 맛이었다. 자극적인 맛과 양념에 지친 육지 것에게는 신선한 3000원의 충격이었다.


이게 얼마나 맛있는 건데,
남기지 말고 먹어봐요


평소 콩을 즐겨 먹지 않아 받자마자 쟁반에서 꺼내 멀찌감치 밀어둔 강낭콩 조림 종지를 보고 할마에는 말씀하셨다. 안 먹었다가는 이 식당에서 나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공포까지는 아니지만 할마에의 기에 눌려 그녀가 시키는 대로 강낭콩을 우걱우걱 씹었다. 엄마가 먹으래도 안 먹는 강낭콩을 제주도의 남쪽 끝 시장 골목 안 식당에서 먹게 될 줄은 몰랐다. 맛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강낭콩은 식도로 넘어가지 않고 입안에서 계속 뱅뱅 맴돌았다. 결국 난로 위에서 끓고 있던 무쇠 주전자의 차를 따라 약 먹듯 꿀꺽 삼켰다.


이렇게 넘어가지 않고 내 입안에서 맴돌던 강낭콩도 씹어 삼키면 결국 내 몸에 들어가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이다. 할마에의 단호한 그 한마디가 없었다면 난 강낭콩을 먹을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제주도에 오기 전,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문제들도 눈을 감고 꿀꺽 삼키고 나면 결국 내 인생에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이라는 걸 안다. 이게 입맛에 맞는지, 어떤 효과가 있는지 머리 아프게 고민하는 것보다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삼키는 용단이 필요할 때가 있다. 무거운 생각에 휩싸여 멈춰 선 채 우물쭈물하며 고민에 빠질 위기에 닥치면 제주 서귀포 할마에의 강낭콩 조림을 떠올려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가 여행을 하는 방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