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로 향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육지와는 다른 여유와 낭만을 꿈꿨다.
2015년, 나는 제주로 향했다.
나는 그간 먹고살기 위해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제주로 떠났던 것이다. 10여 년 간 천직은 아니어도 나름 재미와 보람을 안고 해오던 일에 서서히 유효기간 혹은 끝이 보였기 때문이다. 자의든 타의든 인생 2라운드를 생각해야 하는 상황에 좋은 기회가 왔다. 긴 고민을 하지 않고 제안을 덥석 받아 일주일 만에 짐을 싸서 내려갔다. 내가 제주에 갈 때쯤에는 한창 제주 살기가 유행이었다. 도시살이의 치열함에 지친 많은 젊은이들이 제주로, 제주로 내려갔다. 그 유행 아닌 유행 대열에 몸을 싣고 제주로 향하는 나를 보며 지인들은 놀라움 반, 부러움 반이었다. 평생을 부모님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나이 많은 캥거루에게 생애 최초의 독립이었다. 다행히 일을 제안한 측에서 숙소를 마련해 주어 집에 대한 고민과 걱정은 적었지만, 초보 독거인은 이것저것 많은 기대와 희망을 안고 제주에 도착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난 8개월 만에 다시 육지로 올라왔다. 대외적으로는 예상치도 못했던 메르스 사태로 인한 여파로 계획하던 일들이 많이 틀어지기도 했고, 스톱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정확히 얘기하면 내가 상상했던, 그리고 많은 사람이 상상하던 제주와 현실이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제주 여행자가 아닌 제주 생활자의 삶은 현실이었다. 거실에서 보면 멀리 제주 바다가 보이는 나름 오션뷰의 집, 한라산을 넘어 다니는 출퇴근길, 휴일이면 동네 뒷산 가듯 오름이나 한라산 트래킹을 하는 일 등등 육지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제주 살이의 소소한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보던 소소한 영화나 전시와 공연, 뭘 사야겠다는 목적이 없어도 운동 겸 기분전환 겸 들르던 SPA 브랜드, 기차나 버스를 타고 훌쩍 떠나는 여행 등등 육지에 있을 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제주에선 큰 마음을 먹어야 가능한 일이 되었다. 심지어 인터넷 쇼핑을 할 때면 <제주, 도서 산간 배송 가능> 물품인지를 확인해야 했다. 지극히 도시 지향형 인간인 내가 숨 쉴 공간과 사람이 없었다.
제주로 향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육지와는 다른 여유와 낭만을 꿈꿨다. 그런데 막상 제주에 내려와 보니 제주 사람들은 참 바빴다. 본업 외에 두세 가지의 추가 일이나 알바까지 하며 바쁘게 살았다. 섬사람들의 타고난 부지런함 혹은 생활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제주 임금의 현실을 알게 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임금은 낮고 물가는 비싸다 보니 한 가지일만으로는 생활이 쉽지 않아 부지런하게 이 일 저 일을 하는 것이었다. 돈 문제라는 현실과 마주하니 제주 여행자일 때는 몰랐던 제주의 현실이 차갑게 다가왔다.
현실은 차가웠지만 어디서도 만끽하지 못할 깨끗한 공기, 청정한 바다, 신선한 먹거리 등등 제주살이의 장점을 최선을 다해 누렸다. 하지만 두세 달이 지나고 제주 생활이 익숙해지니 근본적인 외로움이 밀려왔다. 퇴근 후 툭 예정 없이 전화해 친구들과 만나는 일, 예상치도 못한 장소에서 우연히 만나는 일, 얼굴이 보고 싶으면 밤 새 달려가 만나는 일 등등 사무실 문을 나서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삶은 외로움을 넘어 적막했다. 간혹 지인들이 한 달에 한두 번 내가 제주에 사니 얼굴도 보고 여행도 할 겸 내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육지로 돌아간 후의 허전함은 꽤 오래갔다. 비행기를 타야 오갈 수 있는 섬이라는 지리적 위치는 심리적 거리가 멀다. 고작 1시간이긴 해도 언제 어디는 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것과 마음부터 달랐다. 혼자 사는 삶은 어디든 외롭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섬에서 혼자 산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외로움이었다.
얼마 전, 회사를 그만두고 한 달 정도 제주살이를 하러 간다는 지인을 만났다. 그 얘길 들으니 나의 제주 생활 시절이 떠올랐다. 짧지만 행복했고 또 외로웠던 제주에서의 삶… 상상은 현실에 늘 못 미치는 법이다. 너무 많은 기대는 큰 실망을 불러온다. 제주는 천국이 아니다. 현실에서 도망치듯 떠난 곳이 제주라면,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일 뿐이다. 그 사실을 난 간과 했다. 제주는 도시인들에게 여전히 매력적인 이상향이지만 제주에 사는 일은 현실이라는 것!! 그것만 잊지 않는다면 제주는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