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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Mar 20. 2020

내가 여행 짐을 싸고 푸는 방법

애초에 빌미를 주지 말자


나와 함께 여행을 해 본 사람들이 똑같이 하는 말이 있다.


넌 어떻게 그렇게 짐을 빨리 싸고 빨리 풀어?



다년간의 떠돌이 생활로 인해 생긴 스킬 아닌 스킬이다. 앞서 많은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여행자의 짐이란 전생에 자신이 진 업보다. 그래서 나는 의도적으로라도 어떻게든 짐을 줄이기 위해 머리를 굴린다. 꾸미는 걸 좋아하거나 SNS에 인증샷 올리는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불가능했겠지만 기내 반입용 캐리어 하나로 일주일 넘게 여행한 적도 있다. 이 글은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강제로 여행욕구를 꾹꾹 눌러야 하는 여행 애호가들에게는 소소한 팁을, 그리고 어떻게든 여행욕을 풀고 싶은 나를 위해 쓴다.


Step 1. 애초에 짐 자체를 많이 가져가지 않는다


다이어트할 때 최대의 적은 ‘약속’이다. 누군가를 만나면 우선 먹고, 마시고, 떠드는 게 당연한 나에게 다이어트를 결심하면 제일 먼저 정리하는 것이 약속이다. 만날 약속을 줄이면 자연스레 먹는 횟수와 양이 줄어든다.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


여행의 짐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불필요한 짐은 챙겨 가질 않는다. 눈에 보이면 캐리어에 집어넣던 시절이 있었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필요할 것만 같은 기. 분. 이 들기 때문이다. 여행을 갔으니 분위기 있게 비행기 안에서 책을 읽어야 할 거 같고, 운동화 말고 굽 높은 신발도 한 번쯤 신을 거 같고, 드레시한 원피스도 한 번쯤 입을 거 같다. 여행 내내 캐리어 안에 박혀 있다 빛 한 번 보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하지만 격식 있고, 분위기 있는 여행보다는 구석구석에 직접 발도장을 찍는 것에 여행의 기쁨을 느끼는 나에게는 결코 필요 없는 아이템들이었다. 짐을 쌀 때 근 일주일 내에 사용한 아이템이 아니라면 냉정하게 이 여행에 꼭 필요한가?를 고민해 봐야 한다.


여행의 경험이 쌓이면서 여행의 취향이 생기고, 그 취향에 어울리는 아이템들이 무엇인지 구분하게 된다. 휴양지인가? 유적지인가? 도시인가? 야생인가? 여행지의 종류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챙겨야 할 나의 여행 템들은 정해져 있다. 3일 이상 여행은 손톱깎이, 열대 지방이 아닌 이상 A4용지 사이즈의 전기 찜질팩, 일명 쪼리라 불리는 플립플랍은 제일 먼저 캐리어에 챙겨 넣는 아이템들이다. 그 외에는 없으면 없는 대로 살고, 굳이 필요하면 현지에서 구해도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Step 2. 멀티로 이용 가능한 아이템을 챙긴다


집에서야 여러 아이템을 늘어놓고 날씨 따라, 기분 따라, 상황에 따라 골라 쓰곤 한다. 하지만 그게 여행지에서라면 이 모든 게 짐이 된다. 그래서 다양하게 활용 가능한 멀티 아이템을 챙긴다.


메이크업 클렌징이 가능한 바디 클렌저. 건조하고 갈라지는 피부나 머리카락 끝은 물론 벌레 물렸을 때 발라도 좋은 멘톨 성분이 들어간 멀티 밤. 보통은 숄, 비행기에서는 담요 대용, 공원에서는 돗자리 대용으로 활용 가능한 얇고 큰 스카프(까다로운 실크 X // 물빨래 가능한 면 O), 보통 때는 파우치로 사용하다 끈을 달아 가벼운 차림에 외출용 백으로 사용하는 끈 탈 부착형 크로스백. 비올 때는 우산으로, 강한 햇빛을 가리기에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가벼운 크기와 색깔의 양우산. 이 정도가 내가 여행 때 꼭 챙기는 멀티 아이템이다.


여행 시 가장 많은 부피를 차지하는 옷 역시 멀티 아이템 위주로 챙긴다. 돌돌 말아 부피를 줄일 수 있는 바람막이는 바람도 막아주지만 보통 우비 대신 활용하기 좋다. 너무 타이트하지 않은 레깅스는 때로는 잠옷, 때로는 내복, 때로는 조식을 먹으러 갈 때 가볍게 걸치는 홈(?) 웨어가 되기도 한다. 이 건 이때만 써야 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면 나의 여행 짐은 한결 가벼워진다.


Step 3. 각 짐의 고정석을 마련한다


정리정돈의 기본은 각 물품의 지정석을 마련해 주는 거라는 정리정돈 전문가의 말이 떠올랐다. 원래 정리정돈에 그다지 재능이 없어서 아예 늘어놓지 않는다. 최소한의 물품만 꺼내 고정석에 박아 두면 혼돈을 방지할 수 있다.


숙소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내부를 한 바퀴 둘러본 후 문제가 없는지 확인한다. 조명은 잘 들어오는지, 냉난방기는 잘 작동하는지, 욕실에 물은 잘 나오고 잘 빠지는지 체크한다. 문제가 있다면 데스크에 연락해 문제 해결을 요청하고, 문제가 없다면 그제야 각 공간에 짐을 세팅한다.


① 신발류는 출입구 쪽에 가지런히 늘어놓는다 ② 세면용품 및 기초 화장품은 욕실 세면대 위에 세팅한다 ③ 메이크업 제품 및 선글라스는 화장대 혹은 책상에 올려놓는다 ④ 구김이 많이 가는 옷과 아우터만 꺼내 옷장에 건다


그 외의 물품은 캐리어에 넣어 둔 채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쓴다. 캐리어를 열어둘 만큼의 공간이 있다면 당연히 그 공간을 활용하고, 그 조차도 없는 작은 숙소라면 침대 밑에 캐리어를 열어둔 채로 밀어 넣으면 서랍처럼 사용할 수 있다. 침대 밑에 열린 캐리어를 넣어 두면 너저분한 짐들이 보이지 않아서 좋다.


Step 4. 수거의 루틴을 만든다


많이 늘어놓을수록 체크 아웃 날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은 물론, 빠뜨릴 위험도 높아진다. 처음 세팅할 때의 역순으로 수거한 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둘러보는 것으로 체크아웃 준비는 마무리된다.


제일 먼저 신고갈 신발을 제외한 신발은 처음 챙겨 온 그대로 전용 파우치에 집어넣는다. 욕실에 늘어둔 자잘한 아이템들부터 수거한다. 애초에 작은 여행용 사이즈를 여러 개 챙겨 오기 때문에 원래의 짐 보다 반은 줄어든다. 최대한 여행 일정에 맞춰 용량을 사용해 남는 게 거의 없지만, 한 두 번 사용할 정도가 남았다면 과감히 쓰레기통에 넣는다. 화장품 역시 파우치에 넣는다. 옷장에 걸어둔 아우터들 역시 꺼내 돌돌 말아 부피를 최소화시킨다.

수거한 용품들은 침대 위에 집결시킨다. 그리고 테트리스를 하듯 캐리어에 차곡차곡 집어넣는다.


여행  싸고 풀기,  쉽죠잉?

여행 짐 싸기, 이 모든 것에는 ‘나만의 루틴’이 있다. 이 루틴이 생기기까지 나 역시 적지 않은 수업료를 지불했다. 호텔에 짐을 놓고 와서 말도 안 통하는 호텔 직원과 전화로 생쑈를 한 적도 있고, 잃어버린 짐을 찾느라 예상 밖의 시간을 소요해 비행기를 놓칠 뻔한 적도 있다. 어른이 된 나는 더 이상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내 부족함의 결과는 나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내가 택한 방법은 "애초에 빌미를 주지 말자."였다. 여행을 떠날 때는 처음부터 무겁게 짊어지고 다닐 ‘필요’를, 잃어버릴 ‘위험’을, 혹 잃어버리더라도 아쉬움이 생길 ‘미련’을 챙겨 가지 않는다. 무게도 마음도 가벼운 여행이 주는 즐거움 덕분에 나는 쉽게 떠나고 또 쉽게 돌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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