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복에, 기쁠 희. 복희(福喜) 이야기
그녀를 처음 만난 건, 꽃샘추위가 지독했던 3월 2일 중학교 입학식에서였다. 귀밑 3cm 칼 단발로 잘라 휑하게 드러난 가녀린 목덜미로 칼바람이 스며들던 그날. 처음 입어 보는 빳빳한 새 교복이 어색하고 불편해 몸을 꼼지락 거리던 입학식 장에서 내 옆에 선 같은 반 친구가 바로 복희였다. 반 전체 학생 중 열 손가락 안에 꼽힐 고만고만한 키 덕분에 시작된 인연이었다.
교장 선생님의 뻔한 훈화 말씀이 이어지던 그때, 중학교 입학 기념 선물로 받은 검정 에나멜 구두에 뽀얀 모래 먼지가 날아들었다. 입학식이 지루해 꽈배기처럼 몸을 꼬던 복희가 운동장 모래로 발장난을 치다가 생긴 일이었다. 모래 먼지가 날아든 쪽을 흘깃 돌아보니 양볼 가득 주근깨가 촘촘히 박힌 하얀 얼굴의 복희가 멋쩍게 웃고 있었다. 우리는 그날 분명 처음 만났지만, 입학식 내내 조용한 눈빛과 목소리를 낮춘 수다를 주고받으며 오래된 친구처럼 장난을 쳤다. 복희는 늘 그런 식이 었다. 수줍음이 많고 조용했던 나의 깊은 정적을 특유의 쾌활한 성격과 장난으로 와장창 깨곤 했다.
중학교라는 세계는 초등학교와 차원이 달랐다. 시간표는 빽빽했고, 성적을 향한 선생님들의 압박도 빡빡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속도가 더딘 편인 나는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드는 변화에 적응하기 버거웠다. 국영수 과목보다는 체육, 미술 수업에서 빛이 났던 복희. 체육부장이라는 직위를 한껏 이용해 친구들이 여럿 모인 자리에 날 꼭 끌어다 앉혀 어울리게 했다. 복희의 노력 덕분에 난 생각보다 일찍 새 환경에 적응했고, 쉽게 친구들도 사귀었다.
하굣길에도 늘 복희와 함께였다. 집이 같은 방향이었던 우리는 학생 주임 선생님의 서슬 퍼런 눈을 피해 종종 실내화를 신고 하교했다. 분명 교칙에 어긋나는 일이었기에 고지식했던 나는 주저했지만, 대범한 복희는 괜찮다며 재빨리 튀어 오라고 내 손을 잡아끌었다. 소녀들의 짜릿한 일탈의 종착지는 겨우 학교에서 멀지 않은 분식집이었다. 늘 배가 고팠던 우리에게 떡볶이는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는 영혼의 양식이었다. 떡볶이 한 접시를 앞에 두고 늘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언젠가 복희와 얘기를 하던 중 시공간이 멈춘 듯 대화가 끊기고 멍해진 일이 있다. 그 또래 사춘기 중학생들의 대화가 그러하듯, 떡볶이를 먹으며 우리는 부모님에 대한 불만과 불평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내가 가부장적인 우리 아빠에 대한 불만을 한참 털어놓고 나서 복희네 아빠는 어떤지 궁금해 그녀에게 물었다.
“너희 아빠는 어떠셔?”
“우리 아빠? 나 아빠 없어. 어릴 때 돌아가셨어.
남겨 주신 건 이 촌스러운 이름뿐이야.
복 복(福)에 기쁠 희(喜). 복희가 뭐냐 복희가”
복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 온몸이 돌처럼 굳었다. 전원 스위치가 내려간 듯 머릿속 생각 회로들도 일제히 멈췄다. 오늘 아침 먹었던 반찬에 대해 말하듯, 별 감정도 의미도 담겨 있지 않은 건조한 투로 ‘아빠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복희. 그녀의 말에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난 잠시 정신이 멍했다. 왜인지 정적을 오래 두면 안 될 거 같아 급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미안해. 몰랐어. 괜한 걸 물어봤다”
“야 돌아가신 건 우리 아빤데 네가 왜 미안해?
내가 말 안 했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
과거 복희와의 대화들을 되짚어 보니 엄마 얘기는 해도 아빠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나는 상황에 따라, 사정에 따라 부모님과 함께 살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는 걸 머릿속으로는 분명 알고 있는 제법 조숙한 아이였다. 하지만 실제로 주위 친구들 중 부모님이 안 계신 친구는 복희가 처음이었다. 고작 14년, 내 인생에서 처음 맛보는 종류의 당황스러움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죽음이란 단어가 살갗에 와 닿았다. 내가 TV나 책에서 보던 부모님을 잃은 아이들은 늘 눈물이 가득했고, 우울한 표정이었다. 내 머릿속에 단단히 박힌 이런 편견을 한 방에 깨준 복희. 그녀도 그늘이 아예 없는 건 아니겠었지만 세상이 부모님 없는 아이를 그리는 방식과 현실의 복희가 살아가는 방식은 분명 달랐다.
몇 년 후, 복희는 생각지도 못한 당황스러움을 나에게 또다시 훅 안겼다. 까맣게 잊고 있던 복희의 존재가 다시 깨어난 건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동기들과 어울려 대학로에 놀러 갔던 어느 주말, 우연히 중학교 동창 B을 만났다. 단발머리 중학생들은 어느덧 훌쩍 커서 낮술을 즐기는 대학생이 되어 안주가 푸짐하다고 대학로에서 이름난 막걸릿집 앞에서 재회하게 된 것이다. 잠시였지만 이런저런 얘길 하다 B는 불쑥 복희 이야기를 꺼냈다.
“저기 있는 저 대학 병원 말이야.
작년에 복희 장례식 오느라 왔었는데...
벌써 복희 간지 1년이 넘어 가네...”
뭐? 복희의 장례식장?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쾅하고 얻어맞은 듯 얼떨떨했다. 복희와는 새 학년에 올라가 반이 갈리고, 또 중학교를 졸업하며 서서히 연락이 끊겼다. 그런 나와 달리 복희와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했던 B는 나보다 오래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B의 말에 따르면 복희는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진 후 오래도록 병원 생활을 하게 됐다고 했다. 꿈 많던 복희를 무너뜨린 병명은 '백혈병'. 명랑만화 속 주인공처럼 늘 밝았던 복희와 절대 어울리지 않은 병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도 병실에 누워있던 복희. 친구들이 다시 오지 않을 대학 새내기 시절의 즐거움에 취해 있던 5월의 어느 날, 복희는 아빠 곁으로 떠났다고 했다. 내가 기억하는 복희의 곁에는 늘 친구가 끊이지 않아 시끌벅적했다. 그런데 장작 그녀의 장례식장은 한없이 조용했다고 B는 기억했다. 학업도 다 마치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오랜 투병생활을 했던 복희. 그녀의 죽음을 슬퍼할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을 거라고 B는 그 이유를 추측했다. 대신 덩그러니 남은 엄마와 오빠의 얼굴엔 짙은 슬픔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고 기억했다.
생전 처음 겪어 보는 친구의 죽음이었다. 그것도 새파란 스무 살 언저리에 생을 마감한다는 게 어떤 고통이고, 또 어떤 슬픔 일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 죽음이었다. 복희가 병에 걸리고 인사도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날 때까지도 나는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몰랐다. 장례식이 끝난 지 1년 가까이 지나서야 복희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 정도로 나 사는 일에 바빴다. 복희가 가까워 오는 죽음을 인정하고, 그간 살아온 날들을 천천히 돌이켜 볼 때... 그 한 귀퉁이에서 나라는 친구가 있었다는 걸 기억이나 했을까?
복희는 나를 두 번씩이나 [ 죽음 ]이라는 단어로 놀라게 했다. 갓 중학생이 된 사춘기 소녀에게는 ‘아빠의 죽음‘을, 갓 새내기 티를 벗은 스무 살 아가씨에게 ‘자신의 죽음‘을 훅 하고 던졌다. 복희 덕분에 평생 나와는 먼 일일 거라고 생각했던 [ 죽음 ]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이제는 점점 흐릿해져 가는 기억 속에만 살아 있는 복희. 먼저 떠나면서도 무심한 친구에게 이 말을 전하는 걸 잊지 않았을 친구다. 복희의 트레이드마크인 주근깨 가득한 광대를 씰룩 거리며 말했을 거다. 분명 장난기 넘치는 특유의 미소를 뿜으며 말했을 거다.
죽음은 늘 생각보다 가깝지도 또 멀지도 않은 곳에 있어.
산다는 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거니까.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도 무서워할 필요도 없어.
오늘을 살아. 오늘 네 몫의 삶을 후회 없이 살아.
그래야 언제 맞닥뜨릴지 모를 눈 감는 그 순간에
단, 1g의 아쉬움도 없지.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