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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un 01. 2020

집 비밀 번호가 생각나지 않을 때

굳게 잠긴 도어록 앞에서 자아 성찰한 이유


휴일 오전.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니 집안이 조용했다. 다들 각자의 용무 때문에 밖에 나갔나 보다. 쭈욱 기지개를 켠 후,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다. 창 안으로 쏟아지던 햇빛은 눈이 시리게 쨍했다. 이런 날씨에 딱 어울리는 일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이.불.빨.래.


방금 전까지 나와 한 몸이었던 이불을 둥그렇게 말아 가슴팍에 품고 현관문을 열었다. 못생긴 슬리퍼를 직직 끌고 나와 마당에서 이불을 털기 시작했다.  탁. 탁. 탁. 늦잠은 잤지만 성실한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좀 전에 일어나 몸과 마음이 덜 부팅된 상태여서 그럴까? 이불의 힘에 휘말려 몸이 휘청거렸다. 몸 개그를 하기 직전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났다. 미친 균형감각으로 이불과 함께 바닥에 내동댕이쳐질 뻔 한 위기에서 나 스스로를 구했다. 혼자 뿌듯함이 차올라 속으로 생각했다.


나 아직 죽지 않았어!
 

딱 3초 후 나는 그 말을 내뱉은 걸 후회했다. 뼈저리게. 죽긴 뭘 안 죽어. 다 죽었다. 이 머리. 누가 듣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면 분명 하늘이 이 말을 벌을 내린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이불을 다 털고 집으로 들어가려 현관문을 열려는 순간, 문은 당연히 저절로 잠겨 있다. 도어록은 제 할 일을 제대로 했고, 내 머리는 제 할 일을 제대로 못했다. 도어록 키패드를 열었는데 도무지 비밀번호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지우개로 박박 지운 듯 새하얗게. 아니 통째로 그 부분만 들어낸 것처럼 말끔히. 매일 하루에도 서너 번씩 눌러댔던 그 번호가 생각나지 않았다.


당황하지 마. 이럴 수도 있는 거야. 사람이니까.

침착해(짝) 침착해(짝)

그래 키패드의 가운데 번호들만 사용했었지?

천천히 생각해 보자. 할 수 있어. 생각해 낼 수 있어.


투시라도 하듯 키패드를 한참 들여다봤다. 머리가 아닌 몸이 기억하는 숫자들을 눌렀다. 2580 0225, 0852, 0522... 아무리 번호를 조합해 눌러도 오류를 알리는 날카로운 신호음만 연이어 내 귀에 박혔다. 한 5분을 씨름하다 결국 포기 선언을 했다. 현관문을 등에 기대고 주저앉아 버렸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어쩜 하나도 기억이 안 날 수 있냐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나는 이 사태를 냉정히 판단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내 손에는 핸드폰이 없고, 가족들이 언제 돌아올지 기약도 없다. 모든 인간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는다. 그게 시간이 걸리거나 *팔리거나 둘 중에 하나라서 그렇지. 난 두 번째 방법을 택했다. 창피하지만, 옆집에 SOS를 구하기로 했다.


당시의 내 상태는 처참했다. 방금 자고 깨 눈곱도 떼지 못했고, 머리는 묶지 않아 산발이었다. 잘 때 입는 목이 늘어난 티셔츠에 체크 면 반바지. 그리고 오늘의 화룡점정, 멍청하게 생긴 핫핑크 크록스까지... 안면이 있었으니 다행이지 없었으면 동네 부랑자나 노숙자라 불려도 어색하지 않은 꼴이었다.


혹시나 문전박대당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을 가득 안고 조심스럽게 옆집 문을 두드렸다. 다행히 옆집 아주머니는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집은 이 자리에서 30년 넘게 살았지만 옆집이 이사 온지는 채 1년이 되지 않았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그간 인사한 보람을 느끼게 될 줄 상상도 못 했다.


안녕하세요. 옆집 사람인데요...
저... 제가... 집 비밀번호를 잊어버려서요.  
엄마한테 전화 한 통만 할 수 있을까요?


갑작스러운 이웃의 방문에 놀란 옆집 아주머니는 당황한 기운이 역력했다. 내 사정을 듣고, 얼른 휴대폰을 건네며 말씀하셨다. “아휴 다 그래요 사람. 나도 얼마나 깜빡깜빡하는데... “ 말은 그렇게 하셨지만 이 코미디 같은 상황에 터지는 웃음을 애써 참고 계셨다. 그 씰룩거리는 입술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오늘따라 엄마는 왜 이리 전화를 안 받는 걸까? 전화를 받아 들고 엄마에게 전화를 거는 그 10초가 100만 시간처럼 느껴졌다. 긴 신호음에 내 마음도 까맣게 타들어 갔다. 유일한 희망인 엄마가 전화를 안 받으면 다음 대처는 어떻게 해야 하나를 고민하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됐다. 내 상황을 전해 들은 엄마는 한참을 웃고 그제야 비밀번호를 알려주셨다.


옆집 아줌마께 꾸벅 인사를 하고 집으로 너털너털 돌아왔다. 엄마한테 듣고서야 선명해진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이게 뭐라고. 대체 이 4자리 번호가 나를 이렇게 무기력한 인간으로 만드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 4자리 번호를 기억하지 못하면, 내가 내 집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예상치 못한 순간, 의외의 존재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의식하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덜컥 존재감을 드러낼 때가 있다. ‘돌발상황’이라는 이름으로 한 번씩 이렇게 생각의 브레이크를 걸어 주면 그간 내가 얼마나 생각 없이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해 준다. 휴일 오전, 점점 뜨거워지는 5월의 햇빛이 정수리에 꽂혔다. 나를 호되게 나무라는 듯 따끔했다.


당연한 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
세상에 당연한 건 없어.
언제든 네 뒤통수를 후려 갈 길 수 있어.
그것도 아주 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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