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인 서점에서 처음 내 책을 만났을 때
8월 21일. 출간일이 훌쩍 지났다. 그사이 온라인 서점에서 예약 구매했던 지인들이 책을 받았다며 속속 인증샷을 보내왔다. 마치 꼭꼭 숨겨 두고 몰래 쓰던 일기장을 세상에 들킨 것만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쥐구멍이라도 찾아 틀어박히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에겐 아직 할 일이 있다.
전국의 오프라인 서점에 책이 깔릴 거라고 마케팅팀 팀장님이 말씀했던 26일이 되기도 전, 이미 내 발은 서점을 향하고 있었다. 도저히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서울의 대형 서점에 내 이름을 단 책이 팔리는 건 어떤 기분일까? EDM 비트로 쿵쾅거리는 가슴을 안고 광화문 한 서점의 묵직한 문을 밀고 들어갔다.
매번 서점에 갈 때마다 습관처럼 직진하는 에세이 코너. 빛의 속도로 달려가 신간 매대부터 매의 눈으로 훑었다. 날고 기는 책들 사이, 매대 끄트머리에 가녀린 내 책이 겨우 매달려 있었다. 자칫 방심하면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질 끝 of 끝. 그곳이 바로 내가 내 책과 처음 만난 곳이다. 햇병아리 작가에게 허락된 공간이다.
난 오래전부터 서점에서 처음 내 책을 만나는 순간을 수 없이 상상했다. 내가 확인하기도 전에 다 팔려 나가는 거 아니야? 그렇다면 난 감격에 겨울까? 눈물이 나면 어쩌지? 뜨거운 상상을 하던 무명의 신인 작가에게 현실은 한겨울 시베리아 바람보다 차가웠다. 사실, 눈물이 찔끔 났다. 내 책이 안쓰러워서. 이름난 작가였다면 이렇게 매대에 머무를 새도 없이 금세 팔려나갔을 텐데... 유명 작가님들의 화려한 책들 사이에서 작고 여린 내 책이 치이는 모습이 애처롭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대견했다. 그 흔한 유명인의 추천사 하나 없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혹시 내가 머무는 동안 내 책을 사가는 사람이 있진 않을까? 일반 손님 사이에 숨어 신간 매대를 근처를 잠시 빙빙 맴돌았다. 하지만 그런 드라마 같은 일은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 이게 '어쩌다 대박'이 아닌
'꾸준한 존버' 인생다운 시작이지!
며칠 후, 장소는 합정의 한 대형 서점으로 변했다. 지인이 인증샷을 보내줬다. 이번에는 책이 신간 매대에 누워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서 있었다. 다음 날은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서점 신간 코너 중 사람들의 시선이 제일 많이 닿는 황금 라인 한가운데 책이 우뚝 서 있었다. 코로나 시국에도 지인 특파원들의 열정은 뜨거웠다. 마스크로 중무장한 채 내 책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서점의 문턱이 닳도록 오갔다. 각자 자신이 사는 지역의 서점에 현재 어떤 상태로 내 책이 진열되어 있는지, 사진과 동영상으로 상황을 공유해 줬다.
며칠 사이 처음 신간 매대 끄트머리에서 겨우겨우 버티던 내 책이, 서서히 중심으로 자리를 옮겼다. 모양새도 변화가 있었다. 힘없이 누워 있던 책이 목을 가누고 척추를 쫙 펴고 서 있었다. 내 얼굴(=책 표지) 좀 보라고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마케팅팀에서 신경 써서 추가 제작한 포스트잇 메시지가 책 표지에 붙어 팔인 양 오가는 예비 독자들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이 더듬거리는 걸음마를 끝내고 이름 모를 독자의 집으로 달려갈 기세다. 책의 성장을 보고 있으니 이제는 어엿한 초등학생이 된 조카가 걸음마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조카의 걸음마를 지켜보던
언니의 마음이 이랬을까?
‘걸음마’는 아이의 발달 과정 중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이라고 한다. 걸음마를 하는 그 순간부터 아이는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두 손의 자유도 얻게 된다. 그야말로 아이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다. 그래서 아장아장 걸어 다니며 걸음마를 하는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는 여러 감정이 든다고 한다. 고물고물한 아이가 어느새 커서 그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발로 걷는 모습에 기특하고 대견한 마음. 또 동시에 자신 품을 떠나 오롯이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하는 피할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한 짠한 마음. 두 감정이 사이좋게 밀려든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내 책이 걸어갈 길에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내 품을 떠나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움직일 것이다. 급하게 가지 않아도 좋다. 혹시 넘어지더라도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면 된다. 그저 위로와 응원이 필요한 독자들의 품을 향해 지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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