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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Nov 16. 2020

귀찮음을 감수하면 한층 더 맛있어지지

<버섯 불고기 전골>을 만들며 생각한 것들


일요일, 가능하면 한 끼 정도는 내가 차리려고 노력한다. 캥거루 딸의 얄팍한 염치. 일주일 내내 세끼 걱정을 달고 사는 엄마에게 한 끼라도 짐을 덜어 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 자발적 노동이다. 보통은 늦은 오후 산책을 하며 메뉴 고민을 한다. 메뉴를 정하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나 시장에 들러 장을 본다. 그리고 저녁을 차린다.      


지난 일요일 저녁 메뉴는 버섯 불고기 전골. 불고기감과 표고버섯, 새송이버섯, 팽이버섯, 느타리버섯 등 버섯 매대에 있는 모든 종류의 버섯을 쓸어 담아 장바구니에 넣었다. 집으로 돌아와 손을 씻고, 냄비에 물을 넣고 육수를 낸다. 미지근한 물에 당면을 불린다. 불고기 소스는 얼마 전 집에 들어온 선물세트에 포함되어 있던 시판 갈비 양념. 고기에 후다닥 양념을 붓고 잘 재운다. 고기가 양념 옷을 입고, 육수가 우러나는 사이 냉장고 안의 기타 채소 상비군을 정렬시킨 후 다듬기 시작한다. 산더미 같던 버섯 산이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고,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내니 뒷동산쯤으로 작아진다. 버섯 외에도 청경채, 양파, 배추 등 잘 어울릴만한 순둥한 채소들을 한쪽에 가지런히 모아둔다.    

  

커다란 전골냄비에 준비한 버섯과 채소를 두르고, 가운데에 양념이 잘 밴 불고기를 배치한다. 모양을 잡아 놓은 내용물들이 흐트러지지 않게 채소 사이에 조심스럽게 육수를 붓는다. 채소가 숨이 죽고, 고기가 익으면 먹을 준비 완료. 늦가을 일요일의 이른 저녁. 네 가족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뜨끈한 버섯 불고기 전골을 후후 불어먹는다. 전골냄비에 빼곡히 들어찬 각종 버섯과 채소, 그리고 다양한 양념이 어우러진 맛은 선물 세트처럼 다채롭다. 각기 다른 모양의 채소와 버섯들을 씻고 다듬고, 결이 살게 자른 수고로움이 스르르 녹는 맛이다. 요리는 정직하다. 귀찮음의 정도와 맛은 비례한다. 재료가 풍부하고, 손이 많이 갈수록 음식은 맛있어지기 마련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경험이 풍부하고, 부지런히 움직일수록 ‘사는 맛’이 생긴다. 그걸 알면서도 늘 귀차니즘 뒤에 숨었다. 순간의 안락함에 취해 기회가 기회이었는지도 모르고 어물쩍 넘기곤 했다. 마치 감나무 아래에 누워 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마음을 쓰고, 또 몸을 움직이기 귀찮았다. 그러니 내 손 닿는 거리까지 ‘기회’가 알아서 제 발로 찾아오길 바랐다.       


삶이 주는 기회를 잡지 않는 건 죄야.
어떻게든 움켜잡아야 하지.
안 그러면 평생 후회해.


로맨틱 코미디지만 그다지 로맨틱하지 않은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서 꽂힌 대사. 아내의 외도 사실을 알고 분노조절장애를 겪는 남자 주인공. 새로운 사랑 앞에 시작을 망설이는 그에게 아버지가 했던 말이다. 과거의 쓰라린 경험 때문에 현재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진심 어린 충고였다.


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살았던 걸까? 기회가 기회인지도 모르고 흘려버렸던 날들. 기회란 그저 운이 좋은 사람에게 오는 하늘이 내린 선물인 줄 알았다. 난 행운의 여신의 눈 밖에 난 줄 알았다. 그분(?)이 날 일부러 외면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소위 ‘운을 잡은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살았다. 운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 이상의 노력을 해야 했던 정직하기 짝이 없던 내 인생을 원망하며 살았다. 노력도 하지 않고 요행만 바랐던 귀차니스트에게 행운이 제 발로 찾아오는 기적이란 없었다.      


기회는 마냥 기다린다고 오는 게 아니었다. 노력해서 만드는 거였다. 운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뚝 떨어지는 일이란 결코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결과만 본다. 당사자가 아니라면 보통의 그 지난한 과정까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파편만 보고 그 결과가 그저 하루아침에 생긴 대단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결과를 얻기까지 스킵되었을 피, 땀, 눈물의 장면을 타인들은 알 수 없다. 버섯 불고기 전골만 먹은 사람들은 모른다. 장을 보고, 채소를 다듬고, 버섯을 썰고, 육수를 내고, 간을 맞추는 노력을 알 수 없다.   

   

어쩌면, 지금. 맛있는 인생을 위해 재료를 준비하고, 육수를 내는 과정일지 모른다. 어떤 요리가 될지 가늠할 수 없는 막막하고 지루한 날들. 하지만 이 시간이 없다면 내 인생은 맛도 없고, 영양가도 없는 맹맹한 삶이 될 게 뻔하다. 그러니 ‘잠깐의 귀찮음’을 달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좀 더 부지런히 움직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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