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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Feb 09. 2021

그깟 플레이 모빌이 뭐라고

뒤늦은 스벅 플레이 모빌 피규어 득템기

시작은 단순했다. 전날 절친들의 단톡 방에서 수다를 떨다 A의 바뀐 프로필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동그란 사진 속에는 그 말로만 듣던 장안의 화제, #플레이모빌_JOY가 방긋 웃고 있었다. 지난달, 고작 플라스틱 장난감을 사겠다고 새벽부터 줄을 서고 또 웃돈을 얹어 사고판다는 뉴스를 읽었다. 그 기사를 통해 난 처음 플레이 모빌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읽으며 이 궁금했다. 한정판 플라스틱 조각에 사람들은 왜 열광하는 걸까? 그 화제의 현장에 직접 가 보고 싶었다. 그 몹쓸 호기심이 그 아침에 나를 별다방까지 이끌었다.      


오전 8시. 겨우 도시가 잠을 털어내고 일상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전철역 앞 별다방 안은 일찌감치 북적였다. 검정 롱 패딩을 담요처럼 두른 사람들 사이 나도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아직 얼굴 가득 스며 있는 지난밤의 흔적을 마스크 속에 꼭꼭 숨긴 채. 한정판 플라스틱 장난감을 하나 갖겠다고 아침부터 줄을 섰다. 다이어리가 아니라면 담요, 캠핑 의자, 돗자리의 유혹도 굳건히 이겨낸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왜 뒤늦게 그깟 플라스틱 장난감에 마음이 동했을까?      


초심자 주제에 풀세트를 갖겠다는 도 넘은 욕심은 없다. 물론 지갑도 허락하지 않는다. 목표는 그저 제니. 이 시국에 발목 잡혀 멀리 떠나지 못하는 여행 욕을 해소(?)해 줄 페르소나쯤 될까? 초록색 사파리 모자에 배낭을 둘러맨 여행자, 제니가 마음에 훅 들어왔다. 단순한 관상 혹은 전시용이 아니다. 제니에게는 확실한 임무가 있다. 아침저녁으로 앉는 화장대 거울 앞에 제니를 두고 언젠가 여행 메이트 제니를 데리고 떠날 여행을 상상해야겠다 다짐했다. 그 설렘이 차면 온통 회색 같은 내 하루하루가 좀 더 알록달록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차올랐다.      


‘나의 제니‘를 손에 넣기 위해 구매 후기부터 뒤졌다. 적어도 1시간 전에는 별다방에 가서 줄을 서야 안정권이라고 했다. 하지만 난 이 겨울에 한 시간씩이나 기다릴 열정 따위는 없는 사람이다. 대학 입시 때도 안 해봤으니 눈치싸움을 할 감도 없다. 또 치밀하게 계산을 하고 경우의 수를 따지고, 각을 잴 에너지도 없다. 가진 패가 없는 내게 허락된 방법은 단 하나. 그저 운에 맡기기로 했다. 전략은 단순했다. 아침에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별다방에 8시 안에 도착할 수 있는 시간에 눈을 뜬다면 도전한다.      


아침에 눈을 뜬 시간은 오전 7시 30분. 세수하고 양치하고 옷만 입으면 충분히 8시 안에 도착할 수 있다. 관건은 이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부지런한지,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는 지다. 그 또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 만약 플레이 모빌을 손에 넣지 못하더라도 실망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일찍 나온 김에 맥모닝을 먹을 기회니까. 이렇게 나란 사람은 늘 플랜 B를 두고 산다.      


겨울 아침의 칼바람을 뚫고, 몇 개의 신호등을 건넜다. 그렇게 종종거리며 별다방에 도착한 시각은 7시 56분. 매장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한숨을 돌리고 문을 여니 다른 세상이었다. 계산대 앞에 이미 줄이 한가득. 숨 돌릴 틈도 없이 줄 맨 끄트머리에 가서 섰다. 그리고 앞사람이 몇 명인지 셌다. 총 21명. 충분한 안정권이다. (결과론이지만) 플라스틱 장난감 하나 사자고 새벽부터 일어나 서슬 퍼런 겨울바람 속에 한 시간을 기다렸다면 억울했을 거다. 기대하지 않는 일에 행운의 여신은 어김없이 내 편을 들어준다. 여신님, 고오---맙습니다. 혹시 이런 사소한 일들에 내 운들을 다 써버리는 건 아닐까 슬쩍 걱정도 밀려왔다. 에이 뭐가 됐든 아침부터 헛걸음 안 한 것만으로도 오늘은 충분히 운수 좋은 날이다.      


8시가 되자 파트너들의 손이 분주해진다. 계산대에서는 굶주린 하이에나 같은 표정의 ‘어른이‘들이 차례로 계산을 한다. 하이커 제니를 비롯해 서퍼 그레이스, 회사원 제이, 우주인 레오까지... 혹시 원하는 친구가 매진될까 봐 발을 동동거리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계산을 마치고 커피는 받는 둥 마는 둥 플레이 모빌이 담긴 박스부터 안전하게 품고 말한다.      


아 이게 뭐라고...

아니 우리 애가 하고 갖고 싶다고 그래서...   


그 누구도 묻지 않은 답변. 혼잣말치고는 목소리가 컸다. 분명 밤잠 설쳤을 그들의 얼굴 안에는 하나같이 기쁨 70% + 성취감 15% + 겸연쩍음 10% + 허탈함 5% 비율의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얼굴에도 하나같이 멋쩍은 웃음이 슬며시 차올랐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한 그 마음이 뭔지 알 거 같아서. 한때는 적이었지만 어느새 짧은 시간 동안 함께 줄을 서며 생긴 얄팍한 동지애가 우리를 하나로 묶었다. 나도 곧 바라던 제니를 손에 넣었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길 기다리며 절친들의 단톡 방에 전리품(?) 인증샷 올렸다. 이 상황을 공유하는 걸로 플레이 모빌을 항한 나의 짧은 모험은 끝났다.     

   

한 때 ‘모으는 기쁨‘에 빠져 산적이 있었다. 교복을 입던 때는 친구들과 주고받은 시답잖은 내용이 빼곡한 편지와 쪽지를 모았다. 조금 더 머리가 굵어지고서는 좋아했던 ‘감성’ 뮤지션의 이름이 찍힌 음반과 책을 사 모았다. 사회 초년병 시절, 영화 관련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는 <Press>가 찍힌 보도 자료며 스틸컷을 쟁였다. 여행의 재미를 알아가던 때에는 남들처럼 여행지의 이름이 박힌 냉장고 자석이나 스노우 볼을 수집했다. 나란 사람의 취향이나 나의 커리어를 증명하는 ‘일종의 트로피’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니면 먼 훗날 ‘한정판‘이란 이름 덕에 웃돈을 주고 팔아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어 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물건이 넘쳐나는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모으는 것들은 쓰레기가 되고 만다. 금방 먼지가 쌓이고 하루가 다르게 본래의 빛을 잃는다. 살 때만 반짝 관심을 두고 이후에는 방치했기에 생긴 일이다. 엄마의 잔소리를 견디다 못해 결국 쓰레기 봉지로 직행하는 일을 몇 번 겪고 난 후 형체가 있는 무언가를 모으는 일을 멈췄다. 기껏해야 1년에 딱 한 번. 연말에 17잔의 커피를 마시고 받는 별다방 다이어리 정도? 위 건강과 맞바꾼 다이어리 모으기가 내 미약한 수집욕의 최선이다.      


부피를 차지하는 형체가 있는 것들 대신 다른 걸 수집했다. 기억 속에 수납할 수 있는 경험. 메이드 인 차이나 냉장고 자석을 사는 대신, 여행지의 별다방에 들러 그곳에만 있는 특색 있는 메뉴를 맛보는 것 같은 경험 말이다. 경험의 순간을 충분히 음미하는 시간이 대단한 상품들보다 내게 더 큰 만족을 안겼다. 내 성향에는 그게 더 맞았다. 꾸준히 애정을 갖고 관리하는데 재능이 없는 사람에게 아무리 귀한 한정판이 들어온대도 결국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게 뻔했다.


새 식구가 된 ‘제니‘도 그깟 플라스틱 덩어리 본체보다 제니를 손에 넣기까지의 과정이라는 경험을 수집한 거다. 한정판의 유혹에 넘어가 아침잠을 헌납했지만, 충분히 가치 있는, 그리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언젠가 제니에 대한 애정이 식으면 아마 나보다 더 그녀를 아껴 줄 조카의 품으로 입양 보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내 품에 들어온 제니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내가 제니의 장래를 설계하는 동안 내 바로 앞에서 제니를 득템한 남자는 곧장 줄 끝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차례가 되길 기다렸다. 제니를 가졌으니 우주인 레오를 사수하겠다는 그의 눈에는 결연한 의지가 가득했다. 하나를 가지면 세트로 완성하고 싶은 게 덕후의 마음. 이른 아침부터 많은 이들의 불꽃같은 열정을 보며 생각했다. 사람은 가슴속에 좋아하는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하는구나. 그 대상이 몰타에서 건너온 플라스틱 재질의 플레이 모빌이건, 습관이건, 사람이건 말이다. 좋아하는 마음은 사람의 심장을 뛰게 한다. 딱딱했던 머리에 피가 돌고,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묵은 때 같은 무기력을 말끔히 지우고 활력이 채워준다. <좋아하는 마음이 우릴 구할 거야>라는 책의

제목처럼. 삶이 무채색처럼 지루한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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