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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Mar 22. 2021

최적의 온도

<매운 곱창 쌀국수>를 먹으며 생각한 삶의 속도와 온도


“그래! 우리도 요즘 핫하다는 것 좀 먹어 보자.”      


오랜만에 보는 친구와 점심 약속 장소를 정하던 대화의 끝. 경기도의 끝과 끝에 사는 우리는 둘 사이의 중간 지점, 강남에서 보기로 했다. 각자 살기도 바쁜데 코로나 19라는 예상치도 못한 변수 때문에 실로 오랜만에 이렇게 느긋이 얼굴을 보게 된 거다. 금쪽같은 시간을 쪼개 만나는 거니, 아무 곳에나 가긴 싫었다. 흔치 않은 기회니 제대로 그 시간을 채우고 싶었다. 짧은 서치 끝에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줄 서서 먹는다는 <쌀국수 전문점>으로 정했다.      


힙하다는 것을 향한 열정도, 음식에 대한 애정도 식은 지 한참. 한때는 난다 긴다 하는 곳에 가서 직접 먹어보고, 경험해 봐야 직성이 풀렸다. 그것도 다 에너지가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일. 하나를 먹어도 제대로 먹고 싶다는 욕심은 이제 허기만 지우는 정도로 흐려졌다. 그러다 실로 오랜만에 ‘가서 먹어 보고 싶다’는 욕망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약속 당일. 만나기로 한 시간 보나 일찍 도착해 그 근방을 어슬렁거렸다. 긴 대기시간은 필수라는 말에, 조금이라도 기다리는 시간을 줄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서둘러 움직인 결과였다. 많은 후기와 달리 실제로 평일 오전, 영업시간 전에 긴 줄은 없었다. 오픈 시간이 되고 열린 문을 빼꼼 열고 들어가니 일행이 도착하기 전에는 입장할 수가 없단다. 그래. 유명하다는 음식점이니 그럴 수 있지. 근처를 다시 한 바퀴 도니 친구가 도착했다. 설레는 가슴을 안고 위풍당당 음식점 안으로 입장했다.     


대낮인데도 어둑한 내부를 들어서니 베트남의 어느 골목 노상 음식점에 온 기분이었다. 현지어가 쓰인 벽이며 테이블마다 놓인 소스 통과 나무 조명, 직원들의 유니폼까지.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베트남에 온 분위기였다. 앉자마자 직원은 기계 같은 속도와 멘트로 메뉴판과 물을 세팅을 했다. 좋게 말해 신속했고, 나쁘게 말해 사람의 영혼이라는 건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목소리 톤과 손놀림을 봤을 때, 이 식당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가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100m 달리기라도 하듯 숨차게 내달리는 직원의 속도에 당황하지 않았다. 메뉴판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이미 우리의 목표는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곱창을 넉넉히 얹은 새빨간 <매운 곱창 쌀국수>와 숯불 그릴 돼지고기, 생채소, 쌀국수를 느억맘 소스에 담가 먹는 <분짜>. 주문 후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다녀왔다. 채 3분도 되지 않은 시간, 테이블에 이미 음식이 도착해 있었다. 패스트푸드보다 빠른 속도. 거의 시키는 메뉴가 비슷하고 또 손님이 많아서 그런 거겠지. 미리 음식을 거의 만들어 놓고 주문 즉시 나오나 보다. 차오르는 불안을 애써 다독였다.       


기대에 차 <매운 곱창 쌀국수>의 국물을 한 입 떠먹는 순간,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느낌이 밀려왔다. 혹시나 하고 <분짜>도 소스를 뿌려 고기와 함께 면을 집어 입에 넣었다. 역시였다. 다 떠나서 맛은 있었다. 국물은 곱창의 진한 맛이 가득 우러나 있었고, 고기에는 숯불 향이 배어 있었다. 자극적인 강렬한 맛. '보통'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자극 가득한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강하고 매서운 맛이었다.      


문제는 온도. 뜨거워야 할 <매운 곱창 쌀국수>는 미지근했다. 손을 대기 두려울 만큼 뜨거워야 할 두꺼운 사기그릇은 이상하리 만치 영 기운이 없었다. 차가운 그릇이 음식의 열기를 빼앗고 있었다. 기름진 음식이 미지근하면 기름은 국물 위에 둥둥 뜨고, 그 기름은 입안에 그대로 남아 느끼함을 남긴다. 매운맛이 느끼함을 상쇄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곱창의 강력한 기름 파워에 속수무책이었다. <분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온도. 덕분에 네 맛도 내 맛도 아닌 어정쩡한 존재가 됐다.      


맛을 제대로 내기 위한 기본, ‘최적의 온도’를 잃어버린 음식들. 미적지근한 음식들을 뜨는 둥 마는 둥 먹다 결국 음식을 고스란히 남기고 자리를 정리했다. 계산하고 나오는 길, 아까는 보지 못했던 긴 줄이 생겼다. ‘직장인들의 점심 전쟁‘, 그 틈바구니에 끼고 싶지 않아 부지런히 움직인 덕이었을까? 줄 선 사람들의 부러움 가득한 눈빛 세례를 받으며 가게를 빠져나왔다. 한 번의 경험이면 족한 맛이었다. 음식점은 핫했을지 모르지만, 핫해야 할 음식이 그러지 못했다.     


뱃속에는 소화 덜 된 쌀국수가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파티에 온 불청객처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고 있었다. 핫하다는 쌀국수의 여파는 오후 내내 계속됐다. 더부룩한 속을 부여잡고 생각했다. 음식에도 최적의 온도가 있는 것처럼 내 삶도 최적의 온도가 있진 않았을까? 돌이켜 보면 뜨거워야 할 순간에 미지근했고, 차가워야 할 상황에 필요 이상으로 뜨거워지곤 했다. 속도에 몰입하느라 온도를 잃은 <매운 곱창 쌀국수>처럼 최적의 온도를 모르고 살았다. 소화제 대신 택한 지하철역 2개의 거리를 걷는 내내 생각했다.  


사는 게 체한 것처럼
부대끼고 어지러웠던 이유...
어쩌면 급하게 속도만 쫓아가느라
그랬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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