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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Mar 30. 2021

지레짐작 말고 정면 대결

맹금류가 거기서 왜 나와?


재택근무의 나날들. 6시가 땡 울리기 무섭게 노트북을 덮고 집을 나섰다. 왕복 2시간의 산책 겸 운동. 아무리 바쁘더라도 이 시간을 사수하기 악착같이 짬을 낸다. 어제와 다른 루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가 와서 쌀쌀해진 탓인지 전날 걸었던 북쪽 벚꽃길은 아직 잠잠했다. 그러니 오늘은 남쪽이다. 이어폰의 볼륨을 높여 템포 빠른 곡을 귀에 채웠다. 그 리듬에 맞춰 발도 속도를 냈다. 만개한 분홍 진달래와 노란 개나리 사이, 하얀 벚꽃은 아직. 봉오리가 오동통 해지는 걸 보니 하루 이틀 내로 팝콘 같은 벚꽃이 터질 것이다. 작년 이맘때는 어땠는지 궁금해 핸드폰을 열어 사진을 뒤적이며 천천히 걷다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중랑천변 화단에 고꾸라져 있는 매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어? 이게 무슨 일이지?       


콩닥이는 가슴을 안고 서둘러 화단으로 향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누렇게 죽은 잡초들이 무성했던 곳,. 이젠 보드라운 흙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화단 주변에는 출입을 통제하는 선도 쳐 있었다. 그 한가운데 박힌 말뚝 위에 삐딱하게 내걸린 매. 정확히는 매 모양이 그려진 연. 하늘에 날리는 그 연말이다. 슬슬 어둑해지는 분위기, 그리고 갈수록 흐릿해지는 시력의 콜라보로 만들어낸 결과였다.      


매년 그랬던 것처럼 봄이 되면 시청 하천관리과에서 꽃밭을 조성한다. 딱딱한 땅을 헤집어 고르고, 잡초를 버리고, 씨를 뿌렸을 거다. 머지않아 꽃이 피겠지? 작은 씨앗에 싹이 트고 꽃으로 자라기까지 물도 있어야 하고, 햇빛도 있어야 한다. 물과 햇빛만큼 중요한 게 씨앗으로 먹히지 않는 것. 천변에 사는 비둘기, 참새, 까치, 까마귀, 청둥오리 등등 각종 새의 눈에 띄지 않아야 꽃으로 자랄 수 있다. 가을 논에 허수아비를 세우는 것처럼, 봄 화단에 새들을 쫓기 위해 매(정확히는 비닐 연)가 등판했다.     


도시의 새들에게 저 맹금류를 박아 넣은 연이 효과가 있을까? 궁금했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서인지, 귀찮아서인지 사람이 다가가도 도망가기는커녕 뭐 얻어먹을 건 없을까? 주위를 얼쩡거리는 도시의 새들. 종종 엉뚱한 상상을 한다. 어쩌면 사람들이 다 사라진 깊은 밤, 가슴팍에 숨겨둔 지퍼를 열어 거추장스러운 깃털 옷을 벗어던진 새들이 둘러앉아 소맥을 들이키며 ‘도시에서 새로 살아가는 고달픔’ 따위를 얘기하는 건 아닐까? 그만큼 똑똑하고 영악한 새들이 이 도시에 넘쳐난다. 산책 나온 온실 속 화초 같은 개들을 농락하거나, 길고양이의 밥을 빼앗아 먹는 건 일상. 때로는 사람들 머리 위에 분변 테러를 하기도 하고, 둥그렇게 무리를 지어 길을 막기도 한다. 그런 새들에게 매를 프린트한 매 모양 연이 어떤 효과일까? 나처럼 눈 나쁜 새들이 많아 정성스레 연을 걸어 놓은 어느 공무원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배짱 좋은 도시의 새들에 비하면 난 지독한 쫄보다. 날 괴롭힌 건 늘 일어나지 않은 일. 막상 닥치면 어떻게든 수습을 한다. 하지만 문제는 늘 앞서는 걱정. 몸보다 마음이 부지런히 달려가 성급하게 전전긍긍했다. 생기지도 않은 일에 이자를 붙여 잔걱정을 하는 게 일이었다. 진짜 독수리 꽁지 털도 못 봤는데, 독수리에 잡히면 어쩌지? 독수리가 내 숨통을 끊기 전에 잡히는 순간 놀라 심장마비 걸리지는 않을까? 독수리가 날 잡으면 어디부터 쪼아 먹을까? 별별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잔걱정이 일상인 사람에게 희망이나 미래, 긍정 따위는 남의 일이었다. 생기지도 않은 일을 확대 해석하고, 부정의 골대에 밀어 넣는 게 일상이었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에는 저 <매 모양의 비닐 연> 같은 존재들이 많았다. 막상 확인하면 바람에 힘없이 나부끼는 연약한 존재일 뿐. 멀리서 지레짐작하고 잡아먹힐까 무서워 피했다. 그럴 때면 먼 길을 돌아가곤 했다. 좋게 말해 신중함이었지, 현실은 지독한 겁쟁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두려워만 하지 말고, 진짜 실체를 확인해 봐도 됐을 텐데 뭘 그리 겁을 냈을까? 진짜 매였다 한들 잡아먹히기 밖에 더할까? 그게 나의 엔딩이라면 받아들여야 하는 걸. 시간을 돌릴 수 없으니, 그리고 뒤늦은 후회는 쓸모없으니 꼬박꼬박 확인하기로 한다. 지레짐작 말고 정면 대결하기로 했다. 내 앞에 드리운 그림자가 살아 있는 매의 그림자인지, 매의 형상을 한 비닐 연인지. 진짜 매면 맞서고, 매 모양 연이면 날려 버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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