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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pr 02. 2021

벚꽃이 지면 뭐가 오지?

세상에서 제일 큰 추상화 전문 미술관 개관을 기다리며


마음이 급해졌다. 주말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확인한 후부터 쫓기는 신세가 됐다. 틈만 나면 부지런히 산책을 하러 나간다. 여의도 윤중로니, 석촌호수니 멀리 있는 이름난 벚꽃 명소에 갈 필요가 없다. 집에서 5~10분만 걸으면 중랑천이며 공원이며 벚꽃 천지다. 이때가 아니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한다. 탱글탱글한 솜사탕 같은 벚꽃 송이를 만끽할 시간이 많지 않다. 마트에 갈 때도, 도서관에 갈 때도, 은행에 갈 때도, 카페에 갈 때도 일부러 벚꽃 나무가 늘어선 길로 돌아간다. 한정판이라고 하면 우선 쟁이고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 영원하지 않고 어쨌든 끝이 있다는 건, 사람을 부지런하게 만든다.      


카키 베이지색 면 반바지 위에 베이지색 맨투맨티,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선다. 따가운 봄햇살을 가려 줄 남색 모자도 잊지 않았다. 집을 나선 지 3분도 지나지 않아 고민했다. 햇빛이 내리쬐는 집 밖은 도톰한 맨투맨티가 부담스러운 온도였다. 잠시 고민하다 'Go‘를 택했다. 되돌아가는 귀찮음 대신 유연하게 대처하기로 했다. 속에 흰 면티를 입었으니 더우면 벗어 어깨에 걸치면 그만이었다. 이게 바로 경험의 묘미, 연륜의 맛이다.        


채 10분도 되지 않아 계획은 현실이 됐다. 이마에서 성급한 땀이 송골송골 차올랐기 때문이다. 산책로에 들어서자마자 걸음을 멈추고 산책로 한가운데에서 맨투맨 티를 벗느라 옷 속에 머리를 구기고 있을 때, 일이 벌어졌다. 머리가 맨투맨티를 빠져나오는 순간, 눈앞에는 청량미 가득한 노래의 뮤직비디오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불어오는 바람에 벚꽃잎이 소나기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밋밋했던 벽돌색 우레탄 산책로가 삽시간에 우수수 떨어진 연분홍빛 벚꽃 잎으로 뒤덮였다. 방금 전, 옷을 빠져나온 내 머리 위에도 벚꽃잎이 올라앉았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머리에 붙은 꽃잎을 떨어뜨리니 질척임도 없이 스르르 착하게 떨어진다.     

 

발걸음 닿는 곳곳에 봄눈처럼 하얗게 쌓인 꽃잎들을 유심히 살펴보며 걸었다. 빵조각을 따라 걷는 헨젤과 그레텔처럼. 작은 바람에도 이리저리 굴러가던 벚꽃잎은 자전거 타이어에 끼기도 하고, 사람들의 발에 밟히기도 한다. 그렇게 생을 마감하는 벚꽃잎을 한참 지켜봤다. 과연 이대로 벚꽃 잎은 끝이 나는 걸까?      


벚꽃잎이 떨어지면 버찌 열매가 차오른다. 여린 꽃잎을 떨어뜨려야 알찬 열매가 맺힌다. 꽃잎을 붙인 채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벚꽃잎처럼 여렸고, 짧았고, 또 많은 사람이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봐 주던 때가 있었다. 어렸고, 생각은 짧았고, 또 많은 사람의 기대를 실망으로 보답하고 싶지 않아 나를 갈아 결과물을 내던 때가 있었다. 어떤 열매를 맺을지 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여린 꽃잎을 떠나보내야만 열매를 맺는 줄도 모르고, 꽃잎 하나 떨어질까 벌벌 떨었다. 내 청춘의 유통기한도 단축되는 냥 전전긍긍했다. 청춘이 가야 경험이 쌓이는 거고, 여유도 생긴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손 틈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부지런히 사라지는 젊음이 그저 야속했다. 청춘이 저문다고 삶이 끝나는 게 아닌데 말이다.


이번 주말, 비가 내리고 나면 남아 있는 벚꽃잎은 얼마나 될까? 털갈이하는 사춘기 동물처럼, 벚나무의 못생김이 폭발할 시간이 온다. 듬성듬성 남은 꽃잎과 그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연둣빛 새잎. 나뭇잎이 진한 녹색이 되면 검붉은 버찌가 맺히겠지? 다 익은 버찌가 떨어지면 바닥을 캔버스 삼아 그린 추상화가 완성된다. 5월 중순에서 6월이 되면 하얀 벚꽃잎이 떨어졌던 거리에는 버찌색 물감 하나로 그린 추상화를 모아 전시회가 열린다. 세상에서 제일 큰 미술관이 되는 거다. 그렇게 완전한 끝도 없고, 무엇이 언제 어디서 새롭게 시작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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