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신변잡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사 Jun 07. 2021

내시경의 세계

눈 감고, 귀 막고 무식하게 직진하라


얼마 전 생애 처음으로 수면 내시경을 했다. 위와 대장을 동시에. 그간 내시경에 대한 어마어마한 소문들을 들었다. 마취가 제대로 되지 않아 내시경 중간에 깼다거나, 마취 없이 ’쌩’으로 진행하는 악독한(?) 사람들의 리얼한 후기까지... 그중 나를 가장 두렵게 만든 건, 대장 내시경을 위해 속을 다 비우는 일련의 과정들이었다. 내시경 디데이 며칠 전부터 섬유소가 걸릴 채소나 관찰을 방해하는 깨, 고춧가루 등을 피해야 한다고 했다. 한식을 주식 삼아 사는 사람에게 채소, 깨,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은 과연 몇 개나 될까?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자 싶어 3일 전부터 식단 관리에 들어갔다. 내시경 선배들의 후기를 읽고 먹어야 할 음식과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을 구분했다. 복잡하게 꼼수를 쓰느니 식단은 딱 두 개로 통일했다. 흰 죽 그리고 카스텔라. 별로 식욕도 없어 흰 죽과 카스텔라를 하루씩 번갈아 먹었다. 전날 오후 2시, 카스텔라 두 개를 먹는 것을 마지막으로 결전을 위한 마지막 식사를 마쳤다.      


그 후 저녁 8시부터 시작된 비움의 시간. 핸드폰에 알람을 맞춰두고 물에 탄 가루약을 영혼 없이 마셔댔다. 잠잠하던 뱃속은 약 기운이 퍼지고 2시간이 넘어가니 전쟁이 났다. 며칠 전부터 먹은 게 없어서인지 평소 보던 반고체(?) 형태는 없었다. 몸 안의 모든 액체를 쏟아내듯 무서운 기세로 빠져나왔다. 약이 역해서 위로 다 토했다는 사람부터 제대로 약을 먹지 못해 어렵게 잡은 일정을 다시 잡고, 그 괴로운 식단 관리를 또 했다는 사람 등등 나를 졸아들게 만든 후기들은 나와는 다른 얘기였다. 생각보다 수월했다. 식단 관리하는 것도, 장 청소하는 일도.      


새벽 4시에 마지막 약 타임이 있어서일까? 배가 고파서일까? 뒤척이다 결국 잠 한숨 자지 못하고 새벽 7시 병원에 도착했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시청률 견인의 단골 소재로 쓰이는 대장 내시경. 장청소의 괴로움은 무사히 견뎠으니 TV 속 그들처럼 나도 이제 마취가 덜 깬 상태에서 헛소리를 하게 될 거란 직감이 들었다. 엉덩이가 시원하게 뚫린 검사복을 입고 결전의 장소로 향했다. 뚫려 있는 구멍 위로 분명 천으로 가려져 있는데도 걸을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낯선 공기가 엉덩이를 스칠 때마다 묘한 수치심이 밀려왔다.      


두려움 반, 기대감 반의 콩닥이는 가슴을 안고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옆으로 누웠다. 입에 호스가 끼우며 간호사가 주의사항을 얘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별별 생각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마취약 따위가 나를 잠들게 할 수 있을까? 혹시라도 마취가 안 먹혀 중간에 깨면 그 지옥 같은 순간을 어떻... 하... 기도 전에 난 깼다. 머릿속 문장이 다 마무리되기도 전에 간호사가 나를 깨우고 있었다.     


내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모든 검사가 끝나 있었다. 걱정과 달리 나는 마취가 잘 되는 사람이었고 무사히 검사는 끝났다. 정확한 검사 결과는 2주 후에 나오겠지만 한국인의 필수템 위염이 약간 있는 정도를 빼면 위, 아래 모두 깨끗하다고 했다.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5년 후에나 다시 이 엉덩이 뚫린 바지를 입게 될 거다.  


모든 검사를 끝내고 동행자와 근처 죽집에 앉았다. 내시경 검사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거 끝나기만 해 봐. 채소 듬뿍 든 음식 다 먹어줄 거야.'라고 생각했다. 샐러드, 샤부샤부, 비빔밥 등등 먹킷 리스트를 마음속에 적어놨지만 결국 향한 곳은 죽집이었다. 고생한 속을 달래기 위해 선택한 메뉴다. 바로 일반식을 하기에는 좀 미안했다. 허연 죽을 조심조심 떠먹으며 동행자와 건강 관리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절실히 깨닫지만, 귀차니즘이 늘 이기는 악순환을 깨 보자는 결론으로 자리를 마무리했다.      

 



이 구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쫄보. 두려움을 없애려고 수많은 후기들을 찾아봤다. 하지만 마음속에 두려움이 가득하니 내 눈에 들어오는 건 괴롭고 힘든 경험을 한 내시경 선배들의 후기들뿐이었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별거 아니라고 느꼈던 사람들은 굳이 그리 생생한 경험담을 쓸 게 없다. 괴롭고 힘들었던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 같은 고통을 덜 느끼길 바라며 내시경 후배들을 위해 친절하고 세심한 꿀팁을 전한 거였다. 근데 나는 그게 전부인 줄 알고 [ 내시경 = 지옥의 고통 ]이라는 공식을 머릿속에 새겨 넣은 거였다.       


두려움을 지우기 위해 찾아봤던 정보가 되레 내 안에서 두려움을 쑥쑥 자라게 했다. 오히려 독이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북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에 사는 유목민 부부의 아침 식사 메뉴가 뭔지도 알아낼 수 있는 시대. 찾을 수 없는 정보란 없다. 다만 얼마나 않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지가 관건일 뿐. 두려움을 키우는 정보라면 굳이 필요할까? 어차피 하기로 한 거였다면 두려움은 디딤돌이 되지 않는다. 그저 걸림돌이 될 뿐이다. 내시경의 날들이 말해줬다. 어쩌면 적당히 모르고 사는 것도 삶의 행복 지수를 높이는 일이라고. 너 같은 쫄보형 인간은 좀 눈 감고, 귀 막고 무식하게 직진할 필요가 있다고.    

매거진의 이전글 주식 말고, 코인 말고, 부동산 말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