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구역의 실패 적립 왕납시오
짓이긴 밥알을 풀 삼아 김의 끝부분을 단단히 고정했다. 그리고 양손에 고르게 힘을 줘서 꼭꼭 말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김밥은 힘없이 풀렸다. 김밥이라는 녀석은 부끄러움도 없는지, 단무지부터 채 썬 당근까지 알차게 넣은 속을 다 드러낸 채 헤벌쭉 웃고 있다. 이 정도면 ’따로 김밥‘ 수준이다.
아 씨. 망했다!
분명 지난번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단단히 준비했다. 밥물도 여유 있게 잡았다. 뜸도 충분히 들였다. 욕심부리지 않고 속 재료도 적당히 넣었다. 더 이상의 실패는 없다는 결연한 자세로 이것저것 준비했다. 하지만 나의 노력은 수포가 됐다. 속이 다 드러난 ’ 개방형 김밥‘을 씹으며 생각했다. 그래. 역시 사람의 힘으로만은 안 되는 일이 었어. 김발을 사야겠어. 풀어지는 김밥을 단단히 고정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해. 이렇게 또 주방에는 장비 하나가 입성할 이유가 생겼다. 이번 생에 김밥 장사할 계획은 없지만, 김밥을 잘 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왜냐? 김밥을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걸 잘하고 싶은 마음. 단지 그뿐이다.
'포인트 적립하시겠어요? '
피곤함에 찌든 표정으로 바코드를 찍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묻는다. 기계 재생음 같은 목소리로. 겨우 막대 사탕 하나를 사는데도 묻는 말이다. 커피를 사면 쿠폰에 도장을 찍어 준다. 구매금액의 일정량을 포인트로 적립해 주는 건 이 시대의 흔한 마케팅 방법의 하나다. 일정 횟수나 금액이 차면 물품으로 교환하거나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다. 충성 고객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다. 한 번의 구매가 다른 구매로 이어지기를 계산한 수법이다. 결국 경험이 또 다른 기회로 돌아온다.
실패가 실패로만 끝나는 줄 알고 살았었다. 나에게 주어진 기회는 몇 번 없다고 여겼다. 그러니 악착같이 그 기회를 잡아 성공해야만 했다. 주위를 둘러보면 척척 쉽게 성공을 손에 넣는 사람들만 보였다. 운빨 좋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나 싶었다. 반면 나는 자칫 삐끗하는 순간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끝도 안 보이는 천 길 낭떠러지 위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심정으로 두려움 가득 찬 발을 조심히 내디뎠다. 잃을 것도 없으면서 잃을 것부터 걱정했다. 그런데 웬걸? 떨어져 봤자 무릎이 까져 쓰라린 정도였다. 상처는 언젠가 아물고, 그 방법으로 내디뎌서는 안 된다는 경험이 돌아왔다. 실패가 결코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실패와 친해지기 시작했다.
’실패를 적립하시겠습니까?‘
진한 실패의 기운이 밀려들 때면 마음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이가 던진 물음에 답은 늘 똑같다. Yes. 그래서 실패를 겪을 때마다 생각한다. 내 인생의 실패 쿠폰에 몇 번째 도장이 찍혔을까? 앞으로 몇 번의 실패를 더 겪으면 번듯한 결과로 돌아올까? 실패라는 경험들이 쌓이면 분명 더 괜찮은 내가 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이 있다. 하지만 막상 실패 앞에서 부처님처럼 인자한 표정을 짓기란 매번 어렵다.
구겨졌던 표정을 편다. 차오르는 실망과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누른다. 마음을 다잡으며 실패를 분석한다. 책과 인터넷을 뒤지고, 선배님들의 살아 있는 조언을 듣는다. A라는 방법이 안 먹혀 실패했다면 B를 시도하면 된다. B가 아니라면 C도 있고, D도 있다. 그렇게 실패를 할수록 점점 성공에 가까워진다. 실패의 고통에 무뎌지는 대신, 성공이 머지않았다는 믿음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