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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ug 09. 2021

철이 없었죠? 빈혈을 참았다는 게

마음속 빨간색 STOP 버튼을 누르세요



무더위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계속 머리가 무겁고 현기증이 났다. 거북목 때문에 생긴 어깨 통증이 머리까지 흔드는 게 아닐까 추측했다. 벌여 놓은 일을 마무리하느라 요 몇 달, 온 정신을 거기에만 쏟는 중이다. 평소보다 좀 무리한 데다가 무더위까지 겹쳐 증상이 심해졌다고만 생각했다. 미련하게 좀 바쁜 게 마무리되면 괜찮겠지 막연하게 생각했다. 습관처럼 두통약을 삼키며 머지않아 끝이 보이니 몸이 조금만 더 버텨주길 바랐다. 하지만 한계가 왔다. 한동안 멈췄던 코피가 다시 나기 시작했다. 두통약도 듣지 않았고,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겼다. 몇 걸음만 걸어도 휘청이는 일이 잦았다. 이러다 길거리에서 픽 쓰러져 여러 사람에게 민폐 끼치는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별일이 아니길 빌며 병원으로 향했다. 진료실에 들어서자 의사는 내 얼굴을 한 번 쳐다보지도 않고 컴퓨터 모니터에 얼굴을 고정한 채 물었다.     


“어떤 증상 때문에 오셨나요? “     


”더워서 그런지 현기증이 심해져서요. “     


”원래도 있던 증상인가요? “     


”좀 그런 편이긴 한데 최근 심해졌어요. “     


”아 그래요? 보통 여성들에게 현기증이 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     


내 또래였던 의사는 금속테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눈빛을 뿜으며 현기증을 유발한 원인별 가능성에 대해 설명했다. 내 얼굴을 제대로 한 번 보지 않고. 결국은 피검사를 해보자는 얘기였다. 그 말에 몇 달 전 했던 건강검진 결과지가 떠올랐다. 이메일로 받아 본 결과지에는 혈액검사 부분에 철 결핍성 빈혈이 의심되니 전문의와 상의를 해보라던 문구가 있었다. 종합검진 후에는 딱히 몸의 이상을 느끼지 못해 잊고 있었다. 주섬주섬 캡처해둔 결과지를 찾아 의사에게 내밀었다. 그제야 의사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처음으로 눈을 마주치고 얘기할 수 있었다. 결과지 속 각종 수치들을 한참 보던 의사는 말했다.      


”음... 이 정도면 정밀 검사를 해봐야겠네요.

아래층 가서 피 뽑고 결과 보러 3일 후에 다시 오세요. “     


정확히 3일 후 난 다시 진료실에 앉았다. 환자가 들어와도 의사는 3일 전과 똑같이 얼굴을 모니터 속 검사 결과에 고정한 상태였다. 기억할 수도 없는 복잡한 의학용어들을 섞어 한참 설명하던 의사는 철분제를 먹어 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철분이 부족해 생긴 증상이라고 했다. 교복처럼 입던 체크무늬 셔츠와 쉼표 앞머리가 매력적인 카페 사장의 말처럼 난 철이 없었다. 철분제를 먹어 보고도 증상이 나아지지 않으면 그때 다시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다.

     

 처방전과 맞바꾼 철분제를 물과 함께 털어 넣고 다시 일하기 위해 노트북을 켰다. 그런데 이상했다. 뭐지 이 낯선 느낌? 늘 먹구름이 낀 듯 흐리고 무거웠던 머리가 맑고 가벼웠다. 머릿속에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진 후 구름 하나 없이 말갛게 갠 하늘이 펼쳐진 선명한 기분이다. 철분제를 먹기 시작한 후 중간에 잠을 깨지 않고 푹 잤다. 깔깔했던 입이 보드라워졌다. 살기 위해 욱여넣는 밥 말고 먹고 싶은 게 생겼다. 잘 먹고, 잘 자기 시작했다. 철분제의 효과가 이렇게 대단한 건가? 아니면 실제 약의 효능보다 환자의 긍정적인 믿음 때문에 병세가 호전되는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인 건가? 뭐가 됐든 오래도록 나를 괴롭히던 증상들이 금세 사라진 게 신기했다. 수다 단톡방에 철분제의 효과를 칭송하는 메시지를 날렸다. 곧바로 답장이 쏟아졌다.      


- 얘는 대체 어떤 몸 상태로 사는 거야?

- 세상 똑똑한 척은 다 하면서 미련 곰탱이네.

- 몸이 그 지경이면 진료를 볼 게 아니라 입원을 해야 하는 거 아냐?

- 신생아가 아닌 성인이라면 보통 중간에 안 깨고 잠을 통으로 자.

- 일반적으로 음식은 살려고 먹는 게 아니라 먹으려고 사는 거 아냐?     


대체 어떤 삶을 사는 거냐고? 머리는 원래 맑고 가벼운 거고, 잠도 한 번 들면 중간에 잘 깨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고 했다. 정말 나는 어떤 몸뚱이를 데리고 살아온 걸까? 사실 하루아침에 몸이 망가진 건 아닐 거다. 차츰차츰 망가졌을 텐데 그걸 이제야 알았다. 삶은 개구리 증후군(Boiled frog syndrome)이 떠올랐다. 정상이라면 뜨거운 물에 바로 집어넣으면 펄쩍 뛰쳐나오는 게 당연한 개구리. 하지만 찬물에 담가 아주 찬찬히 데우면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죽는 개구리와 내가 뭐가 다를까? 온도가 올라가는 걸 알아채지 못하고 삶아지는 개구리처럼 통증이 심해져도 그게 당연한 거라고 여기며 살았다. 다들 이 정도의 두통과 현기증은 달고 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온갖 것들을 향해 예민을 떨고 살면서 정작 내 몸의 통증에는 둔했다. 몸은 무거운데 신경이 날카로워진 이유가 있었다. 짜증지수가 폭발한 건 무더위와 습도의 콜라보가 만든 불쾌지수 탓만은 아니었다. 현명한 몸은 이렇게 한 번씩 브레이크를 잡아준다. 마음만 앞서 직진하려는 멍청한 주인의 속도를 조절해 준다. 잠깐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지금 나와 내 주변을 살피고 확인하고 알려준다. 아침저녁으로 손톱만 한 빨간 단추 모양의 빈혈약을 먹는다. 물과 함께 삼키면 식도를 타고 위를 지나 온몸 곳곳으로 퍼지는 철분들. 그 약을 먹을 때마다 마음속 빨간색 STOP 버튼을 누르는 기분이다. 과속하지 말고, 숨차지 않을 딱 내 속도로 가자고. 마음과 몸의 속도는 언제나 같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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