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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ug 11. 2021

QR코드 앞에 선 죄인

난데없는 오지랖 다짐기(記)



아침을 먹으며 리모컨을 누르다 <인간극장>에 버튼이 멈췄다. 본방송은 아니고 어느 채널에서 재방송 중인 에피소드로 주인공은 중학교 교복을 입은 할머니였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 뒤늦게 배움의 즐거움을 알아가는 할머니의 하루하루가 담겨 있었다. 생전 처음 써본 3D 펜으로 하트 모양 장식품을 만들어 아들에게 자랑하던 할머니의 주름 가득한 얼굴에는 소녀의 설렘이 스며 있었다. 그런데 한문 수업이 끝난 후 할머니는 울고 있었다. 지난 수업에 한문으로 자기 이름 쓰기를 배웠던 할머니. 일주일이 지난 후 복습을 해보자는 선생님의 부름에 칠판 앞에 섰지만, 성 빼고 이름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던 거다. 머리가 빠릿빠릿하게 돌아가는 거의 증손주 뻘인 반 친구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 돌아서면 까맣게 잊어버리는 자신이 한심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평생 자기 이름을 한자로 쓰지 못했어도 아이들을 번듯하게 키워냈던 굳센 할머니가 울고 있었다.      




병원, 식당, 백화점, 극장 등등 일흔이 넘은 엄마, 아빠를 모시고 어디를 갈 때마다 매번 우리를 막아서는 게 있다. 바로 전자출입 명부. 망할 놈의 코로나 19가 퍼지는 걸 막기 위해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공공장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개인의 신상정보가 담긴 QR코드를 찍고 들어가야 한다. QR코드가 당연한 시대니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하지만 전화를 걸고 받기만 하는 아빠와 스마트폰이어도 기본 기능 외에 간단한 검색과 동영상 보기가 전부인 엄마. 두 분께 QR 코드는 좀처럼 넘기 힘든 산이다. 물론 수기 작성도 있고, 전화 등록으로 인증을 하는 방법도 있지만 익숙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흔들기만 해도 QR코드가 나오도록 스마트폰을 설정해 드렸는데도 흔들면 된다는 그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린다. QR코드를 찍어야 하는 상황이면 똑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안내자들의 차가운 눈빛을 받으며 죄인이 된 듯 주눅 든 부모님. 허둥거리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짠함이 차오른다. 이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아예 엄마 아빠의 핸드폰을 수거해 빛의 속도로 일괄 처리해 버린다.      


기분 탓일까? QR코드를 찍거나 출입 명부 작성을 해야 입장할 수 있다고 안내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대다수가 짜증 가득한 표정과 날카로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작은 개인 매장부터 체계적인 서비스 교육을 받았을 백화점이나 대기업 매장도 별반 다르지 않다. 매번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해야 하는 피로와 막무가내인 사람들에게 시달리며 쌓였을 묵은 스트레스가 말투와 표정에서 느껴졌다. 코로나 19가 없었다면 하지 않았을 불필요한 감정노동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불편하고 번거롭기는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능숙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죄인이 되어 버린 상황이 불편하고 서글펐다.


QR코드뿐만 아니라 키오스크 주문, 배달 앱, 무인 매장, 지문인식 등 비접촉과 비대면이 당연해진 언택트 시대가 길어지면서 디지털 신기술이 일상 깊숙이 들어왔다. 내가 편리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부모님을 비롯한 윗세대에게는 거대한 불편함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렇게 코로나 19는 사람 사이에 균열과 계급을 만들었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소외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지금은 부모님 같은 디지털 취약계층이지만 그 화살은 멀지 않아 나에게도 돌아올 거다. 나도 나이를 먹을 테니 부모님의 ‘오늘’이 남의 일 같지 않다. 허둥거리는 부모님의 모습에 자꾸만 내가 겹쳐 보였다. 머지않은 미래에 나 역시 부모님처럼 차가운 기계 앞에 우왕좌왕할 게 뻔했다. 새로운 기계나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때가 분명 올 거라는 걸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남의 일에 무관심하기로는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 나지만, 자꾸 오지랖을 떨게 된다. 은행 ATM 기계 앞에서 난감해하는 사람을 볼 때, 패스트푸드점 키오스크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어르신을 볼 때, 스마트폰의 낯선 경고창에 어쩔 줄 몰라하는 낯선 이를 볼 때 선을 넘어 참견하게 된다. 한자를 몰라도, 스마트 폰을 몰라도 자식들 훌륭하게 잘 키워냈던 어르신들이 앞으로만 나아가는 시대와 시스템 앞에 죄인이 되는 게 안타까워 슬쩍 끼어든다. 필요한 게 뭔지 질문을 하고, 내가 해결 가능한 선이라면 기꺼이 오지랖을 부린다. 평생 유능하게 살아온 당신들이 기계 앞에서 순간 느꼈을 무능을 지우는 데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참견하고 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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