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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ug 23. 2021

딱복파입니다만

소고기 딱복 국도 환영합니다

  

평소 뭘 사달라고 하는 편은 아니다. 필요하면 내가 사면되니까. 하지만 과일만큼은 엄마한테 사다 달라고 한다. 돈을 주고 사는 것 중에 과일만큼 복불복인 게 또 있을까? 잘못 고르면 무(無) 맛에 당첨될 확률이 높다. 공산품이야 별점을 보고, 상품평을 보면 되지만 맛있는 과일을 고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과일도 브랜드가 있고, 품질이 상향 평준화됐다고 하지만 여전히 난 과일을 잘 모른다. 과일 고르는 내공만큼은 나보다야 뛰어나실 테니 엄마의 안목을 믿는다. 이 계절쯤에는 요청사항을 콕 집어 말한다.   

  

‘엄마, 딱복!!’     


얼마 지나지 않아 까만 봉지를 한가득 채운 딱복이 도착했다. 과수원을 떠나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솜털마저 싱싱하게 살아 있는 보송보송한 딱복들을 보고 있으니 한동안은 원 없이 딱복을 누릴 수 있겠구나 싶어 행복했다. 맹렬했던 여름 더위가 한풀 꺾이자 딱복의 계절이 시작됐다. 한여름 더위를 견뎌낸 단단한 딱복이 내게로 왔다.      


달콤한 과즙이 줄줄 흐르는 물렁한 복숭아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난 확신의 딱복파다. ‘물복’을 먹기 위해서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아무리 조심히 잘라도 물러 버리기 때문에 보통은 씻어서 바로 입을 대고 먹는다. 한입 베어 먹는 순간 입안에 과즙이 퍼지지만, 그 과즙은 입을 타고, 또 손을 적신다. 꿀로 샤워한 듯 손과 입이 끈끈하다. 인간 끈끈이가 된 기분이다. 파리라도 많았다면 해충퇴치라도 하지. 요즘은 파리도 잘 없다. 그저 나는 끈끈한 인간이 됐을 뿐이다.      


이렇게 아무리 깔끔하게 먹으려 해도 딱복을 먹고 나면 손과 입이 엉망이 되고야 만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물복‘의 공격에 매번 속수무책 당하고 만다. 그에 반해 ’딱복’은 깔끔하다. 사과를 자르듯 내가 칼을 넣는 방향에 따라 정갈하게 잘린다. 손도 입도 끈적해질 일이 없다. 뽀얀 과육이 아삭하게 씹히는 딱딱한 복숭아는 딱 이즈음에만 맛볼 수 있는 계절 한정 과일이다. 먹을 수 있는 시기가 짧아서 그럴까? 더 맛있게 느껴진다.     


 


반 딱복파들은 말했다. 딱딱한 복숭아가 좋으면 ‘소고기 딱복 국’이나 끓여 먹으라고. 딱딱한 복숭아의 맛과 질감이 마치 진짜 무(daikon, white radish) 맛과 비슷하다는 의미로 뼈 있는 농담을 하곤 한다. 강경 딱복파로서 꽤나 신선한 비난이었다. ‘소고기 딱복 국’ 얘기를 처음 듣고 박장대소했다. 반 딱복파들에게 딱복은 무같은 존재였다니... 하긴 내게 물복은 물기 잔뜩 머금은 향기로운 스펀지 같으니까. 물복이 있다 해도 번거로운 물복보다 무맛의 딱복을 선택할 내게는 그다지 ‘마상’ 당할 말이 아니었다.       


뭔가를 먹을 때, 식감이 좋아야 더 맛이 있다고 느낀다. 내가 좋아하는 식감은 대게 탄력과 밀도가 있는 식재료다. 물컹하고 미끌한 느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복숭아도 물렁한 복숭아가 아닌 딱딱한 복숭아, 감도 물컹한 홍시나 연시가 아닌 단단한 단감, 흐물흐물한 물고구마보다 목이 컥컥 막히는 밤고구마, 물렁한 늙은 호박보다 딴딴한 단호박을 선호한다. 후루룩 넘어가는 소면보다 쫄면이나 냉면처럼 탄력 있는 면발이 좋다. 진밥보다는 된 밥, 말캉한 찹쌀떡보다 쫄깃한 가래떡, 물렁한 회보다 씹는 맛이 있는 건어물에 손이 더 간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느슨함보다는 탄력 있고, 성글기보다는 밀도가 있는 편을 좋아한다.      


작은 상처에도 금세 살이 무르고 속이 곪아 버리는 ‘물복’이 나 같아서 싫었을까? 과육이 연약해서 손길만 스쳐도 상처가 나는 ‘물복형 인간’이 아니라 과육이 밀도 있게 들어찬 단단한 ‘딱복형 인간’이 되고 싶다. 아작아작 핑크빛 딱복을 씹으며 생각한다. 좀 맹맹하더라도 딱복처럼 단단한 사람이 될 방법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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