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끗이 쌓이면 펑하고 터지지
‘삐끗‘이 차곡차곡 쌓이다 펑 터지는 날이 있다. 주말이라 굳이 알람을 맞추지 않고 잠들었다. 내가 눈을 뜬 시간은 알람 없이도 보통 깨는 시간보다 훨씬 늦은 시간이었다. 어제 특별히 피곤했나? 돌아봤지만 딱히 그런 상태는 아니었다. 약속이 있었고, 서둘러야 그 시간에 맞출 수 있을 정도였다. 얼른 씻고 나와 어젯밤 잠들기 전에 머릿속에 미리 세팅해 두었던 옷들을 입었는데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옷장 앞에서 서성이며 옷을 바꿔 입으니 전철역까지 달려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고, 우산을 쥐고 전철역에 도착해 계단을 올랐을 때, 슬픈 소리가 들렸다. 전철이 떠나는 소리. 간발의 차이로 전철을 놓치고, 잠시 나의 아침을 돌이켜 봤다. 오늘은 뭔가 꼬이는 날이었다.
서울 시민들은 상상도 못 할 만큼 배차 간격이 긴 주말 전철을 타야 하는 경기도민은 하염없이 기다린다. 버스를 탈 수도 있겠지만 비 오는 주말 도로 사정은 하늘도 모르고, 땅도 모르고, 내비게이션도 모른다. 방법이 없다. 승강장에 덩그러니 앉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다음 차를 타면 가까스로 약속 시간에 세이브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그리 호락호락한 날이 아니다. 약 1시간을 타고 있는 동안 ’ 신호대기 또는 앞차와의 간격 유지 관계로 잠시 열차가 멈춘다 ‘는 기관사의 안내 방송이 3번은 넘게 나왔다. 마음은 급한데 전철은 내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환승역이 가까워져 왔을 때쯤 좀 늦을 거 같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늦는 이유와 미안함을 담아 보내기 버튼을 누르고 고개를 들어 보니 문이 닫히고 있었다. 내가 내려야 할 역과 그렇게 멀어져 갔다. 일이 삐끗하려니 이렇게 되나?
한 정거장 더 가서 내려 반대편 승강장으로 가서 전철을 타고, 다시 환승역에 도착했다. 2호선을 타기 위해 긴 환승 구간을 걸어갔다. 사람들 손마다 쥔 우산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은 스케이트장처럼 미끌거렸다. 이제 몇 정거장만 가면 이 ’삐끗의 향연‘도 끝이다. 조금만 더 조심하자. 생각하며 발걸음을 조심조심 옮겼다. 무사히 최종 목적지까지 데려다 줄 전철을 탔고, 전철 안은 한적했다. 불운이 서서히 옅어지는 거 같아 마음이 놓였다.
합정역에 내려 개찰구를 빠져나오는 순간, 일은 벌어졌다. 우산을 옆구리에 끼고, 한 손으로는 카드를 태그 하고, 한 손으로는 이제 곧 도착이라고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어수선하게 빠져나오다 미끌하더니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다리가 쭉 뻗어지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졌다. 머릿속에서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어? 이거 큰일 나겠는데?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다리는 가위가 된 듯 일(一) 자로 찢어졌다. 개찰구 앞에 고인 물 웅덩이에 쭈욱 미끄러졌다. 요가를 하며 다리 찢기를 한 보람을 이렇게 갑작스레 체감할 줄 몰랐다.
사실 물리적 통증보다 민망함이 더 일찍 몰려들었다. 이 슬랩스틱 코미디 영화의 한장면 같은 상황을 누가 볼까 스프링처럼 얼른 튀어 올랐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숙여 몸 상태를 확인했다. 바닥에 닿았던 충격과 마찰 때문에 무릎에는 멍이, 엄지발가락 왼쪽에는 찰과상이 생겼다. 피는 나지 않지만 삐끗한 다리가 계속 욱신거렸다. 오늘 정말 더럽게 운이 없네. 아침에 눈 뜰 때부터 차곡차곡 쌓인 ’삐끗‘들이 터져 나왔다. 울고 싶었다. 하지만 울 수 없었다. 넘어진 그 순간만 본 사람들은 애도 아닌 다 큰 어른이 고작 개찰구 앞에서 넘어진 걸로 우는 거라고 오해할 수 있으니까.
버튼이 눌리는 순간이 있다. 결과만 보는 상대방은 이게 왜? 여기서? 갑자기?라고 당혹스러워한다. 하지만 그 버튼이 눌리기까지 당사자만 아는 ’삐끗‘의 순간들이 차곡차곡 적립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대방은 결코 모른다. 한순간에 터지는 일은 거의 없다. 원인이 있으니 결과가 생기는 거다. 압력이 서서히 가해졌기에 풍선은 터지는 거고, 수 없이 도끼질을 했기 때문에 나무는 쓰러진다. 사람의 감정은 변화가 풍선이나 나무처럼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서로가 더 조심해야 하고, 또 더 표현해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꾹 하고 ’ 굿바이 버튼‘이 눌릴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