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그럴 수 있어
아침부터 핸드폰을 쥐고, 문자를 보낼까 말까 고민했다. 아침에는 정신없이 바쁠 테니 점심 지나서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까먹을 수도 있으니 우선 나와의 채팅창에 하고 싶은 말을 텍스트로 적기 시작했다. 문자를 받을 사람은 택배 기사님이었다.
연휴가 되기 전, 일찌감치 주문했던 두유 2 상자. 연휴가 끝나자마자 바로 한 박스가 도착했고, 나머지 한 박스의 행방이 묘연했다. 배송 조회를 눌러보니 늘 오시는 A기사님 말고 가끔 오시는 B기사님의 이름 옆에 <미배송>이라고 쓰여 있었다. 처음 보는 표기였다. 아직 배송이 안 됐다는 건가? 두 상자가 따로 송장이 찍혀서 각 기사님께 배정된 건가? 별별 추측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미 A기사님은 두유 한 상자를 가져다주셨으니, 주인을 잃은 나머지 두유 한 상자는 지금 어디서 울고 있을까? 미아가 된 내 두유 한 상자를 찾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온몸을 감쌌다.
분명 배송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당일배송, 총알 배송, 로켓 배송, 샛별 배송이 난무하는 빨리빨리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주문한 상품이 (연휴가 끼어 있다 해도) 일주일 가까이 감감무소식이라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무작정 화를 내기보다 원인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왜냐? 나는 스마트한 소비자니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니까.
하나씩 엇나간 퍼즐을 맞추기 시작했다. 우선 택배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운송장 번호를 넣고 어디까지 상품이 왔는지 확인했다. 분명 우리 집 근처 영업소에 도착했고, 동네를 담당하는 기사님께 인수되었다. 그런데 집에는 오지 않았다. 누가 훔쳐 간 건가? 우리 집은 단독주택이라 CCTV도 없으니 확인할 방법이 없다. 자, 그럼 다시 사건은 원점으로. 쇼핑몰에 들어가 주문 내역을 훑었다. 그런데 느낌이 좋지 않다. 상품명에서 섬뜩함이 느껴졌다.
12팩? 네? 12팩이요? 24팩이 아니고? 인터넷 쇼핑으로 수없이 두유를 샀지만 12팩을 산 적은 없다. 낱개로 사려면 편의점이나 마트를 간다. 12개를 나눠서 파는 것도 (내 기억에는)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두유 소분(?) 판매가 여기 있었다. 연필 한 다스가 12개고, 굴비 한 두름이 20마리, 김 한 톳이 100장인 것처럼 내게 두유 한 상자는 24팩다. 쇼핑몰 주인장이 [두유 한 상자 = 24팩]이라는 일반적인 통념을 교묘하게 이용해 저렴한 척 소비자들을 낚았을 수도 있다. 같은 공장에서 나오는 공산품의 경우 최저가를 찾아 헤매는 소비자들이 물기 딱 좋은 떡밥이었다. 바보같이 떡밥을 덥석 물어 버렸다. 누가? 몇천 원 싸게 사보겠다고 쇼핑몰을 장시간 뒤진 스마트한 소비자인 척했던 내가!
당연히 24팩인 줄 알고 수량을 2개로 체크 해 주문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12팩짜리 2개니까 총 24개가 맞다. 24팩이니 한 박스에 온 게 당연했다. 산수만 할 줄 알면 틀릴 수 없는 문제다. 근데 주의력 결핍인 내가 이 문제를 틀렸다. 배송은 제대로 된 거고, 주인을 잃은 두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만 못 본 건가 싶어서 상품 후기 창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 같은 피해자들이 가득했다. 별점은 짜기가 천일염 수준에 분노 가득한 후기 내용은 비슷비슷했다. 당연히 24팩인 줄 알고 샀는데 12팩이었다며. 다른 사이트보다 싸길래 품절될까 봐 얼른 결제하느라 12팩인 줄 몰랐다며. 꼼꼼하게 확인하지 않은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그럴 수 있어. 불쑥불쑥 화가 날 때 나 자신을 다독인 말이다. 택배 기사님이나 쇼핑몰 담당자의 실수를 무던하게 이해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이해받아야 할 사람은 나였다. 증발하듯 사라져 버린 택배를 찾기 위해 추리하고, 분석하고, 의심했던 나는 숫자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하는 숫자 바보였다. 아찔하다. 만약 ‘12팩’이라는 그 숫자를 보지 않았다면? 택배 기사님과 쇼핑몰 직원에게 분명 ‘정중한 문의‘를 가장한 ‘소심한 항의‘를 했을 거다. 당신들이 하는 일에 문제가 있으니 확인을 해 보라고. 하지만 문자를 보내기 전에 다시 한번 확인한 과거의 내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흑역사를 만들 뻔한 위기에서 극적으로 탈출했다.
하루에 2개, 아침저녁으로 단백질 두유를 먹는다. 부족한 단백질을 채우기 위해 약 먹듯 챙겨 먹는다. 두유를 먹으며 몸에는 단백질을 채우고, 구멍이 술술 뚫린 허술한 내 생각에는 다짐을 채운다. 남의 문제 지적하기 전에, 화내기 전에 나는 과연 제대로 했는지 먼저 점검할 것. 눈을 똑바로 뜨고 다닐 것. 특히 숫자!!! 사람이니까 한 번은 그럴 수 있지만, 사람이니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