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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Sep 07. 2021

밀림의 왕 납시오

지독한 계획 주의자의 반성문


띠링! 카톡 알람이 울린다.     

 

"넷플 결제의 달입니다."    


벌써 3개월이 지난 건가? 친구들과 계정 공유를 통해 정답게(?) 넷플릭스에 발을 담그고 있다. 계정주 친구는  달에  번씩  몫의 금액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청구 알람이  때마다 생각한다. 지난달 넷플릭스에 들어갔었던가? 딱히 기억에 남는  없다. 그렇다면 지지난달은? 떠오르지 않는다. 이번 프로젝트만 끝나면 봐야지 하고 마음속에 즐겨찾기 해둔 목록은 먼지만 뽀얗게 쌓여 간다. 노트북을 켜고 클릭  번이면 넷플릭스에 들어가는데 그게 귀찮아 꾸준히 돈만 내고 있다. 부지런한 계정주 친구는  달에  편만 봐도 본전은 뽑는 거라고 당부했지만 그걸  다음으로 미룬다. 세상 온갖 것에 부지런을 떨면서 대체  이러는 걸까?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들이 온오프라인에서 뜨겁게 화제가 되고 있는데 나는 보지 않았다. 어디를 가든 대화의 주제가 되는 이 핫한 콘텐츠에 대해 난 할 말이 없다. 딱히 드라마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그나마 다큐와 영화를 보려고 넷플릭스 물결에 합류했다. 근데 넷플에 들어가지도 않고, 어쩌다 들어가도 내 손이 가는 건 최신 작품도 아니고 대부분 00년대 유행 지난 영화들, 이미 다 본 영화들 뿐이다. 나 자신도 이해가 안 된다. 별거에 다 부지런 떨면서 넷플릭스는 예외 일까? 콘텐츠 뷔페를 차려 놨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걸음수를 알려주는 앱에서 광고성 퀴즈를 맞히면 10원, 20원 정도의 포인트가 쌓인다. 매일 그걸 꼬박꼬박 모아 커피로 바꿔 마신다. 공짜 커피라 그런지 더 맛있다. 보통 30분 거리는 버스 타는 게 아까워 정말 급하지 않는 한 걸어 다닌다. 길에 버린 시간과 무릎 관절이 닳아 없어진 건 까맣게 잊고 아낀 버스비 1450원이 그저 흐뭇하다. 근데 콘텐츠 하나 안 보고 3개월마다 꼬박꼬박 넷플릭스에 돈을 상납하면서 몇십 원, 천몇백 원을 아끼고 좋아하는 나란 인간은 뭘까? 이렇게나 모순덩어리다.   

   

숨 쉴 틈 없이 바쁜 시즌을 보내고 있다. 일에 치일 때면 이 일을 마무리하고 해야 할 일들을 목록으로 적어둔다. 일에 쫓기다 잠시 마음을 환기시킬 때 생기는 버릇이다. <거대한 옷 무덤으로 변신 중인 행거 정리>, <책장에 쑤셔둔 철 지난 문서들 버리기>, <전시회 가기>, <사용기한 지난 화장품 버리기>, <레일과 손잡이가 망가진 서랍장 바꾸기>, <넷플릭스 찜한 콘텐츠 보기>, <최애가 나온 동영상 콘텐츠 시리즈 몰아 보기>, <반납 연기해둔 도서관에서 빌린 책 읽기> 등등 해야 할 일들이 가득 쌓여 있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고 느끼지 않던 불편이 바쁠 때는 꼭 거슬린다. 마치 시험 공부 직전 책상 청소를 하고 싶어지는 것과 같은 심리다.    


분명 내게 시간이 없었던 건 아니다. A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B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 분명 2주간의 시간이 있었다. 근데 난 저 리스트 중 겨우 전시회 하나만 클리어했다. 행거에 옷은 그대로 쌓여 있고, 책장에 삐죽삐죽 튀어나온 문서들도 그대로고, 사용기한 지난 화장품도 먼지 쌓인 채 그대로다. 하루에 10시간 넘게 노트북 앞에 앉아 있지만, 넷플릭스에 들어가는 일도 다른 동영상 콘텐츠를 보는 일도 없다. 기계처럼 일만 하고 있다. 책도 일과 관련된 거 외에는 펼쳐 보지도 못하고 있다. 2주. 14일. 336시간, 20160분이 있었는데 딱 하나만 실행했다. 마음만 먹으면 항목별로 1~2시간이면 해낼 일들도 있는데 미루고 미룬다. 이 정도면 난 밀림의 왕, 사자다.     


설렁설렁 지내다 2주간의 황금 같은 시간은 지나가 버렸다. 다시 일개미 모드를 장착해야 할 시간이 됐다. 일, 잠, 식사 외에 요일과 시간 별로 정해 둔 루틴(예를 들자면 브런치에 글쓰기, 산책, 운동)을 제외하면 친구들과의 일상 수다도,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도, 나를 채우는 일도 다 미뤄두고 있다. 허울만 그곳에 있지 사실 정신은 딴 곳에 있는 상태다. 멀티가 안 되는 인간은 마음과 시간을 쪼개 쓰지 못한다. 그러니 내게 1순위가 아닌 일들은 자꾸 미루게 된다. 미루다 미루다 결국 밀림의 왕이 되는 거다. 어흥 아니 어휴.      


지독한 계획 주의자는 또 계획을 세운다. 이번 바쁜 시즌이 지나면 여행을 가야지. 바닥까지 에너지를 탈탈 털어 쓰고 나면 늘 숨어드는 남쪽 바닷가의 작은 호텔에 처박혀 책만 읽어야지. 뒹굴거리다 배가 고프면 근처 시장에 가서 마늘 치킨을 포장해 와 닭다리를 뜯으며 맥주나 마셔야지. 이 상상만으로 바닥난 에너지가 살짝 채워진다. 그 힘으로 일단, 이번 일을 잘 마무리할 거다. 그리고 여행에서 에너지를 채워 돌아와 밀림의 왕이 미뤄뒀던 저 리스트를 해치우리라 다짐한다. 바쁜 시즌이 끝나면 변명할 거리도 없으니 밀림의 왕 타이틀은 훌훌 던져 버리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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