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계획 주의자의 반성문
띠링! 카톡 알람이 울린다.
"넷플 결제의 달입니다."
벌써 3개월이 지난 건가? 친구들과 계정 공유를 통해 정답게(?) 넷플릭스에 발을 담그고 있다. 계정주 친구는 석 달에 한 번씩 내 몫의 금액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청구 알람이 올 때마다 생각한다. 지난달 넷플릭스에 들어갔었던가? 딱히 기억에 남는 게 없다. 그렇다면 지지난달은? 떠오르지 않는다. 이번 프로젝트만 끝나면 봐야지 하고 마음속에 즐겨찾기 해둔 목록은 먼지만 뽀얗게 쌓여 간다. 노트북을 켜고 클릭 몇 번이면 넷플릭스에 들어가는데 그게 귀찮아 꾸준히 돈만 내고 있다. 부지런한 계정주 친구는 한 달에 한 편만 봐도 본전은 뽑는 거라고 당부했지만 그걸 또 다음으로 미룬다. 세상 온갖 것에 부지런을 떨면서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들이 온오프라인에서 뜨겁게 화제가 되고 있는데 나는 보지 않았다. 어디를 가든 대화의 주제가 되는 이 핫한 콘텐츠에 대해 난 할 말이 없다. 딱히 드라마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그나마 다큐와 영화를 보려고 넷플릭스 물결에 합류했다. 근데 넷플에 들어가지도 않고, 어쩌다 들어가도 내 손이 가는 건 최신 작품도 아니고 대부분 00년대 유행 지난 영화들, 이미 다 본 영화들 뿐이다. 나 자신도 이해가 안 된다. 별거에 다 부지런 떨면서 넷플릭스는 예외 일까? 콘텐츠 뷔페를 차려 놨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걸음수를 알려주는 앱에서 광고성 퀴즈를 맞히면 10원, 20원 정도의 포인트가 쌓인다. 매일 그걸 꼬박꼬박 모아 커피로 바꿔 마신다. 공짜 커피라 그런지 더 맛있다. 보통 30분 거리는 버스 타는 게 아까워 정말 급하지 않는 한 걸어 다닌다. 길에 버린 시간과 무릎 관절이 닳아 없어진 건 까맣게 잊고 아낀 버스비 1450원이 그저 흐뭇하다. 근데 콘텐츠 하나 안 보고 3개월마다 꼬박꼬박 넷플릭스에 돈을 상납하면서 몇십 원, 천몇백 원을 아끼고 좋아하는 나란 인간은 뭘까? 이렇게나 모순덩어리다.
숨 쉴 틈 없이 바쁜 시즌을 보내고 있다. 일에 치일 때면 이 일을 마무리하고 해야 할 일들을 목록으로 적어둔다. 일에 쫓기다 잠시 마음을 환기시킬 때 생기는 버릇이다. <거대한 옷 무덤으로 변신 중인 행거 정리>, <책장에 쑤셔둔 철 지난 문서들 버리기>, <전시회 가기>, <사용기한 지난 화장품 버리기>, <레일과 손잡이가 망가진 서랍장 바꾸기>, <넷플릭스 찜한 콘텐츠 보기>, <최애가 나온 동영상 콘텐츠 시리즈 몰아 보기>, <반납 연기해둔 도서관에서 빌린 책 읽기> 등등 해야 할 일들이 가득 쌓여 있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고 느끼지 않던 불편이 바쁠 때는 꼭 거슬린다. 마치 시험 공부 직전 책상 청소를 하고 싶어지는 것과 같은 심리다.
분명 내게 시간이 없었던 건 아니다. A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B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 분명 2주간의 시간이 있었다. 근데 난 저 리스트 중 겨우 전시회 하나만 클리어했다. 행거에 옷은 그대로 쌓여 있고, 책장에 삐죽삐죽 튀어나온 문서들도 그대로고, 사용기한 지난 화장품도 먼지 쌓인 채 그대로다. 하루에 10시간 넘게 노트북 앞에 앉아 있지만, 넷플릭스에 들어가는 일도 다른 동영상 콘텐츠를 보는 일도 없다. 기계처럼 일만 하고 있다. 책도 일과 관련된 거 외에는 펼쳐 보지도 못하고 있다. 2주. 14일. 336시간, 20160분이 있었는데 딱 하나만 실행했다. 마음만 먹으면 항목별로 1~2시간이면 해낼 일들도 있는데 미루고 미룬다. 이 정도면 난 밀림의 왕, 사자다.
설렁설렁 지내다 2주간의 황금 같은 시간은 지나가 버렸다. 다시 일개미 모드를 장착해야 할 시간이 됐다. 일, 잠, 식사 외에 요일과 시간 별로 정해 둔 루틴(예를 들자면 브런치에 글쓰기, 산책, 운동)을 제외하면 친구들과의 일상 수다도,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도, 나를 채우는 일도 다 미뤄두고 있다. 허울만 그곳에 있지 사실 정신은 딴 곳에 있는 상태다. 멀티가 안 되는 인간은 마음과 시간을 쪼개 쓰지 못한다. 그러니 내게 1순위가 아닌 일들은 자꾸 미루게 된다. 미루다 미루다 결국 밀림의 왕이 되는 거다. 어흥 아니 어휴.
지독한 계획 주의자는 또 계획을 세운다. 이번 바쁜 시즌이 지나면 여행을 가야지. 바닥까지 에너지를 탈탈 털어 쓰고 나면 늘 숨어드는 남쪽 바닷가의 작은 호텔에 처박혀 책만 읽어야지. 뒹굴거리다 배가 고프면 근처 시장에 가서 마늘 치킨을 포장해 와 닭다리를 뜯으며 맥주나 마셔야지. 이 상상만으로 바닥난 에너지가 살짝 채워진다. 그 힘으로 일단, 이번 일을 잘 마무리할 거다. 그리고 여행에서 에너지를 채워 돌아와 밀림의 왕이 미뤄뒀던 저 리스트를 해치우리라 다짐한다. 바쁜 시즌이 끝나면 변명할 거리도 없으니 밀림의 왕 타이틀은 훌훌 던져 버리는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