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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Sep 09. 2021

몽블랑 케이크를 사 오는 어른이 됐네

가을의 맛, 밤 그리고 몽블랑 케이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담한 수제 케이크 집이 생겼다. 재료도 좋은 걸 쓰고, 디자인도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SNS 계정에 들어가 봤다. 역시나 소문 그대로였다. 후기들을 살펴보고는 엄마 생신 때 여기서 주문해야겠다 일찌감치 마음먹었다. 디데이 일주일 전, 예약을 위해 직접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전화나 DM으로도 주문이 가능하지만 직접 보고 싶었다. 작고 깔끔한 가게에는 쇼케이스 가득 케이크가 들어차 있었다. 각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케이크들을 훑어보던 내게 직원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내 목표는 가족들 대부분이 좋아하는 망고 케이크. 그런데 일주일 후에는 망고 케이크 시즌이 끝날 예정이라고 했다. 혹시 특별 주문을 할 순 없냐고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직원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 져었다. 그럼 차선을 택해야 한다. 라인업을 다시 꼼꼼히 살폈다. 시그니처인 멜론 케이크는 내가 별로고, 블루베리 케이크와 바나나 초콜릿 케이크는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기라는 복숭아 요거트 생크림 케이크, 자몽 얼그레이 케이크는 어르신들의 취향과 멀었다. 쇼케이스 앞에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던 내게 직원이 조심스럽게 제안을 했다.     


다음 주에 새 케이크가 나와요. 몽블랑!

밤이 듬뿍 올라간 케이크가 나오거든요.

아직 디자인을 정리 중인데

하루 이틀 안에 확정할 거니까

정해지면 사진 바로 보내드릴게요.

보고 결정하세요.     


아! 몽블랑 케이크... 그래 밤 시즌이구나. 가을을 대표하는 ‘밤’을 잊고 있었다. 밤이라면 가족이 좋아하는 견과류다. 밤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초등학교 때쯤의 기억이다. 여름이 지나 날씨가 선선해지기 시작하면 시장에 밤이 등판한다. 이때가 되면 엄마는 양손 가득 밤을 사 온다. 잘 씻은 밤을 큰 냄비에 가득 넣고 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냄비에서 하얀 김을 내뿜기 시작하면 우리의 손도 바빠진다.  ‘밤 다 됐다는 엄마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바닥에 신문지를 넓게 깔고 티스푼을 준비한다. 드디어 밤을 먹을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아기 주먹만 한 개량된 요즘 밤에 비하면 1/4이나 될까? 반들반들한 조약돌 크기의 밤들이 신문지 위로 폭포처럼 쏟아진다. 가족들은 봉긋 솟은 ‘밤 동산’을 중심에 두고 옹기종기 둘러앉아 밤을 먹기 시작한다. 작은 밤을 칼로 까는 일은 귀찮고 또 어린이들에게 위험했다. 엄마가 밤을 까는 속도는 4남매가 밤을 먹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니 과도 대신 각자 티스푼을 들고 전투에 임한다. 아직 따끈따끈한 밤을 어금니로 탁 깨물어 반을 쪼갠 후 티스푼으로 밤의 속살을 파먹는다. 다람쥐라도 된 듯 가족이 신문지를 깔고 둘러앉아 밤을 먹던 날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언젠가 이 기억을 언니에게 얘기 한 적 있다. 그때 재밌었지 않냐고? 나는 ‘밤‘하면 이 장면이 떠오른다고 설레서 한창 떠들었다. 하지만 반대편에 앉은 언니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 그랬었나?’ 언니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꼬꼬마인 나보다 고학년인 언니의 기억이 더 선명할 텐데... 언니에게는 그다지 인상적인 순간은 아니었나 보다. 분명 같은 현장에 있었는데도 이렇게 다르게 기억이 박힌다.      


티스푼으로 밤을 파먹는 날의 기억이 떠올라 피식 한 번 웃고 일단 몽블랑 케이크를 택했다. 며칠 후 직원은 약속한 대로 디자인 확정된 케이크 사진을 보내줬다. 반짝이는 밤 조림과 보드라운 밤 크림이 듬뿍 올라간 몽블랑 케이크. 스위스 알프스 지역 만년설이 있는 몽블랑산을 닮아 몽블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했던가? 산에 하얀 눈이 쌓인 것처럼 밤 크림 위에 슈가 파우더도 소복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케이크만으로도 가을 분위기를 느끼기 충분했다. 예약을 확정하고 생신 당일 직접 픽업해왔다. 생신상에서 나름 존재감을 뽐낸 몽블랑 케이크는 식사 후 가족들의 디저트가 됐다. 적당히 달달하고 포근하고 고급진 맛. 몽블랑 케이크를 먹으며 가족들 몰래 혼자 또 피식거렸다. 조약돌만 한 밤을 티스푼으로 파먹던 어린이가 무럭무럭 자라 이름부터 우아한 몽블랑 케이크를 사 오는 어른이 되다니... 잘 컸네. 제법.


또 몽블랑 케이크를 사려면 부지런히 돈을 벌어야 한다. 아침에 눈뜨기 무섭게 기계처럼 나갈 채비를 하던 내게 엄마가 설렘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밤 쪄 먹자.‘ 아침 일찍 앞집 아저씨가 가져다주신 밤 한 봉지 덕분이었다. 대부분의 아침이 그렇듯 마음은 조급했지만, 쉽사리 엄마의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다. 내가 씻고 밥을 먹는 사이 엄마는 금세 밤을 쪘고, 집을 나서기 전 햇밤을 맛볼 수 있었다. 드넓은 신문지 대신 자그마한 쟁반 위에 밤이 쏟아졌다. ’니 밤이 크네, 내 밤이 더 다네 ‘ 어깨 싸움하며 먹을 언니, 동생도 없다. 이제는 엄마와 나뿐인 짧고 소박한 밤 잔치. 이렇게 많은 게 변했다. 하지만 어금니로 살짝 깨물면 톡 하고 쪼개지면서 둘로 나눠지는 밤은 변함없었다. 올가을에는 몇 번이나 밤을 먹을 수 있을까? 마음이 급해졌다.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부지런히 밤을 먹어야겠다는 설레는 숙제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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