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 안의 연습장이자 쓰레기통
사과, 배, 포, 고기, 전, 떡,
고사리, 약과, 밤, 대추...
늦은 저녁, 갑자기 영혼 없이 발랄하기만 한 AI 음성의 랩이 집안 가득 퍼지기 시작했다. 무슨 소린가 싶어 귀를 기울여 들어 보니 제사상에 오르는 식재료 목록이다.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미션인가? 아이디어 한 번 신 박하네...라고 생각했다. 대체 어떤 래퍼의 작품인가 궁금해 거실로 나왔다. 그런데 정작 티브이는 깜깜했고, 그 앞에는 구부정한 어깨 위로 고개를 푹 숙인 엄마가 있었다. 스마트폰을 쥐고 어쩔 줄 몰라하는 엄마가 바로 유교 풍 랩 메이킹의 주인공이었다. 몇 년째 같은 핸드폰을 쓰고 있어도 일흔이 된 엄마에게 스마트폰은 여전히 낯설다. 그래서 이렇게 종종 내게 SOS를 청한다.
뭐가 잘못 눌렸는지 시각 장애인을 위한 화면 읽기 모드로 바뀐 바람에 스마트폰이 혼자 주절주절 화면 내용을 읽고 있었다. 카톡 채팅창 중에서도 엄마가 메모장처럼 쓰는 나와의 채팅 내용이었다. 엄마가 곧 있을 제사를 앞두고 까먹지 않기 위해 적어둔 장보기 목록이었다. 매 번 메모지에 펜으로 적었던 엄마께 나와의 채팅 사용법을 알려 드렸다. 그 세계를 알게 된 엄마는 이 기능을 살뜰히 이용한다. 내가 쓰는 휴대폰과 기종이 달라 한참 뒤적거린 끝에 AI 음성 요정을 조용히 퇴장시켰다. 급한 불을 끄고 엄마가 자신과 나눴던 채팅 속 대화들을 슬쩍 훑어봤다.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티브이 건강 프로그램에 나온 요리 레시피, 잊지 말아야 할 쇼핑 목록, 다음 날 해야 할 일, 기억하고 싶은 문구나 사진들이 채팅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역시 시간과 노력을 쏟아 디지털 만학도를 가르친 보람이 있다.
하지만 나와의 채팅 기능을 활용하는 나와 엄마 사이에 차이가 있다. 엄마에게는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내 손 안의 메모장이라면 내게는 메모장이자 연습장이고 또 쓰레기 통 역할을 한다. 생각이 뒤죽박죽일 때, 화가 날 때, 말이 막 나갈 거 같을 때면 나와의 채팅 창부터 켠다. 우선 하고 싶은 말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 내려간다. 그리고 한 번 쭉 본다. 과한 부분이나 부족한 부분은 없는지 다듬어 군더더기 없는 문장을 만든다. 다듬은 생각을 하나의 문장으로 남긴다. 이렇게 내용을 문자로 적어 내려가며 생각을 정리하는 순간, 나와의 채팅은 연습장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조금 전 까지도 터지기 직전 폭탄처럼 위태롭던 감정과 누군가를 베어버릴 듯 날카로운 말들이 어느새 무뎌지고 정리가 된다. 나와의 채팅이 이제는 불필요한 감정을 버리는 쓰레기통으로 변신한 거다. 물론 스마트폰에는 별도의 메모 앱이 있다. 메모장이 그냥 기록을 위한 도구처럼 느껴진다면 나와의 채팅은 누군가와 대화하는 느낌이 든다. 상대방의 답은 영원히 오지 않겠지만 ‘보내기’를 누르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전달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남들에게는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여도 내향형 인간은 고민을 세상에 꺼내 놓았다는 그 행위만으로도 위안을 느끼곤 한다.
설익은 생각과 감정들을 제멋대로 상대방에게 투척하고 수없이 후회했다. 내 안에서 정리 안 된 내용이 타인에게 제대로 전해질 리 없다. 태생이 쫄보라 내가 의도한 바와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결과들을 보고 겁이 나 입을 다물곤 했다. 더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건 누군가에게는 수긍이나 동의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안고 끙끙거리니 속병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여러 방법을 찾다가 나와의 채팅에 닿게 됐다. 머릿속 생각이 세상 밖으로 나와 글자가 되면 한 발 짝 떨어져서 볼 수 있다. 머리를 뜨겁게 만들던 온도는 차 분해지고, 폭풍처럼 몰아치던 감정은 잠잠해진다. 머릿속 생각이 뜨거운 용암 같다면, 생각이 글자가 되는 과정에서 서서히 식게 된다. 그리고 글자가 된 생각을 눈으로 읽으면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감정의 열기가 빠진 덕분이다. 성급하게 날뛰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 문제 해결의 골든타임은 존재한다. 하지만 정확한 원인 파악과 해결 방법을 찾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에 쫓겨 감정을 앞세우다가 는 일을 그르칠 확률이 높다.
심심할 때면 지난 나와의 채팅 속 내용을 훑어본다. 지금 보면 처음에 왜 저렇게 생각했지? 싶은 내용이 넘쳐난다. 단어 몇 개, 조사 하나, 문장의 마무리만 조금씩 다른 내용이 반복되어 붙여 넣기가 되어있다. 이래서 기록이 중요하다. 생각이 다듬어지는 과정이 보인다. 내가 조금 더 괜찮은 사람으로 매만져지는 내력이 눈앞에 펼쳐진다.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대처할지, 어떤 단어를 써서 속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할지 머릿속에 그려진다. 지난번처럼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문제를 해결할 자신감이 생긴다. 그래서 자꾸 나와의 채팅창을 두드린다. 나의 메모장이자 연습장 그리고 쓰레기통을 알뜰하게 활용한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무엇보다 내가 만족하는 내가 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