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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Oct 15. 2021

왜 제주는 김밥의 격전지가 됐나?

그날 김밥 순례의 종착지는 한라네 김밥


      

서귀포 호텔에 도착하니 하루 해가 떠날 차비를 막 시작한 때였다. 얼른 짐만 던져두고 방을 나왔다. 떠나오기 전 처리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 짓느라 정신이 없어 점심을 놓쳤다. 여행은 타이밍이다. 치고 빠지기를 잘해야 여행의 만족도가 높아진다.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을 위해선 지금 움직여야 한다. 머릿속에 숙소 근처에 먹을 만한 음식점 이름이 리스트업 됐다.       


근처 ㅇㄴㅈ 김밥 1순위로 떠올랐다. 처음 접하기 전에도 이미 전국구 김밥 맛집으로 유명했던 곳. 튀겨낸 속재료 덕분에 고소한 맛이 특징인 ㅇㄴㅈ 김밥. 수년 전 이곳의 김밥을 맛있게 먹었던 좋은 기억이 자연스레 발길을 ㅇㄴㅈ 김밥으로 이끌었다. 걸어가며 지도 앱에서 휴무 아님, 브레이크 타임 끝났음을 확인했다. 전화 예약이 필수인 그곳. 혹시나 하고 전화를 걸었다. 친절하지만 인간미 없는 녹음된 긴 안내 연결음이 나온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지만 끝내 수화기 너머에서 받는 사람은 없었다. 운 좋게 예약 취소된 김밥을 ‘겟’할 수 있지 않을까? 일말의 희망을 안고 ㅇㄴㅈ 김밥으로 향했다.      


코너를 도니 가게 앞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도로에는 예약 주문한 김밥 픽업을 하려 기다리는 차들이 즐비했다. 여전했다. 아니 더 치열했다. 사람들 사이에 먹이를 하나 놓고 눈치싸움을 하는 맹수들의 긴장감이 흘러넘쳤다. 그래도 김밥은 먹을 수 있겠지? 안일한 생각을 품은 ‘김밥계의 하이에나’가 가게 문을 열려는 찰나. 문 앞 안내판이 날 막아섰다.   

   

준비된 모든 재료 소진으로
영업 마감합니다. 감사합니다.     


네? 영업시간이 4시간도 더 남았는데요? 그렇다. 이 말은 즉 <너는 오늘 고소한 ㅇㄴㅈ 김밥을 먹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럴 일이야? 대체 장사가 얼마나 잘되는 거야? 근데 왜 제주까지 와서 굳이 김밥을 먹지?’라고 생각하며 제주에서 첫 식사로 김밥을 택한 김밥 덕후는 쓸쓸히 후퇴했다.     


하지만 돌아서는 발길이 무겁지 않았다. 지독한 계획형 인간에게는 늘 플랜 B가 있다. 멀지 않은 곳에 나의 차애, ㄷㅈㅇㄴ 김밥이 있으니까. 한동안 제주에 못 온 사이 ㅇㄴㅈ 김밥이 굳건한 아성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지만 ㄷㅈㅇㄴ 김밥도 ‘제주 5대 김밥’에 등극할 만큼 유명해졌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 대체 ‘제주 5대 김밥’은 누가 선정한 걸까? 아시는 분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신선한 속 재료가 가득 찬 ㄷㅈㅇㄴ 김밥은 올 초 한라산에 오를 때 처음 맛봤다. 그때도 숙소는 같았고, 기름진 ㅇㄴㅈ 김밥이 당기지 않아 호텔에서 가까운 ㄷㅈㅇㄴ 김밥을 택했다. 눈이 쌓인 한라산에서 먹었던 속이 꽉 찬 ㄷㅈㅇㄴ 김밥. 그때의 기억이 좋았으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ㄷㅈㅇㄴ 김밥에 도착했다.      


그런데 여기는 임시 휴무 공지가 나를 막아섰다. 추석 연휴에도 문을 열었던 이곳은 사장님께서 병이 나서 갑작스레 휴무를 결정했다고 했다. 새벽부터 수십 가지의 속 재료를 준비하고, (과장 좀 보태) 어른 팔뚝만 한 김밥을 꾹꾹 말려면 사장님이 병이 날 만하다. 재료를 준비하고, 김밥을 마는 중간중간 쉴 새 없이 울리는 예약 주문 전화까지 받으니 몸이 멀쩡한 게 이상할 일이다. ㄷㅈㅇㄴ 김밥을 못 먹는 건 아쉽지만 사장님의 하루빨리 쾌차하길 빌며 발길을 돌렸다. 나처럼 갑작스러운 휴무 공지에 당황한 사람들을 헤치고 걸으며 김밥 덕후는 생각했다. ‘사람들이 무슨 제주도까지 와서 김밥을 먹고 그래? 제주에 먹을 게 얼마나 많은데?’

      

제주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와 마주하는 일은 흔하다. 게다가 난 이 정도로 포기할 사람이 아니다. 왜냐? 오늘의 정답은 김밥이니까. 그렇다면 3안으로 간다. 앞의 두 김밥집보다 거리가 있어서 미뤄뒀던 서귀포 등기소 건너의 <한라네 김밥>으로 간다. 그래도 걸어갈 거리는 되니 괜찮다. 걸으면 좀 더 배가 꺼질 거고, 그러면 김밥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지극히 김밥 덕후다운 생각의 흐름이다. 하지만 관건은 시간. 아침 일찍 여는 김밥집의 특성상 일반 식당보다 일찍 닫는다. 걸음을 재촉해 무사히 김밥을 사수했다. 기본인 한라네 김밥 한 줄, 오징어채 김밥 한 줄. 여기서 포인트는 2줄 이상 사면 딸려 오는 무짠지다. 알뜰하게 무짠지까지 챙겨 숙소로 돌아왔다. 종일 땀에 절었던 몸을 씻고, 경건한 몸으로 김밥과 마주했다. 양손의 힘이 달라서인지 언제 뜯어도 한쪽이 두껍게 뜯긴 짝짝이 젓가락으로 짭짤달달한 무짠지를 집어 김밥 위에 올린다. 그리고 크게 입을 벌리고 한입에 넣는다.      


그래 이거지


고소한 참기름 향이 먼저 코를 훅 치고 올라온다. 그 후에는 바다 내음을 품은 김이 툭 하고 터지면 고슬고슬하게 익은 밥알이 느껴진다. 이어서 어묵, 햄, 달걀, 당근, 우엉, 단무지까지 차근차근 정직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화려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정직하면서도 풍성한 김밥 맛. 발품을 파느라 허기진 덕인지 어느 때 보다 맛있었다. 간장 물에 삭힌 무를 건져 고춧가루가 들어간 갖은양념으로 버무린 무짠지가 다른 두 곳과 차별점이다. 빠르고 쉽게 끼니를 때우는 음식의 대명사 김밥이 한층 백반 같은 든든함을 더하는 포인트다. 그래서 한라네 김밥을 입에 넣으면 조화를 이루면서도 개성을 잃지 않는 10인조 아이돌의 무대가 떠오른다. 일사불란하면서도 다채로운 맛이 고작 김밥 한 줄에 다 담겨 있다.     


계획에도 없던 김밥집 순례 끝에 ‘획득’한 한라네 김밥을 먹으며 생각해 봤다. 제주는 왜 김밥의 격전지가 됐을까? 제주까지 와서 굳이 김밥을 먹는 사람들의 심리는 뭘까? 이걸 궁금해하는 나도 제주에 와서 김밥을 먹는다. 하지만 나는 다만 꼭 제주여서가 아니라 어디서든 김밥에 진심인 사람일 뿐이다.      


다시 ‘제주 김밥 미스터리‘로 돌아가 보자. 제주는 고품질의 쌀이 날 만큼의 비옥한 논도 없고, 윤기 자르르르한 김을 생산하는 양식장도 없다. 그런데 제주의 김밥집에 사람들이 줄을 선다. 여기에는 김밥이라는 음식 자체의 편의성이 가장 큰 몫을 하리라 추측한다. 코로나 시국 이전에도 줄 서는 김밥집은 홀 식사가 없었다. 그건 모두 포장이라는 말. 애초에 홀 영업을 하다가도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 포장만 허락한다. 거기에 기다림을 줄이고 안정적인 수요를 예측하기 위해 <사전 예약 시스템>을 도입하는 순간 급이 달라진다. 한. 정. 판. 이 세 음절의 단어 앞에 사람들의 눈이 돌변한다. 쉽게 먹기 힘든 음식이라는 희소성이 여행자들의 심리를 자극한다. 거기까지 갔는데 그건 먹어봐야지. 피케팅을 하는 심정으로 전화기를 붙잡고 ‘김밥케팅‘을 한다. 시간이 곧 돈인 여행자에게 이동 중에도 빠르게 배를 채울 수 있는 김밥은 좋은 식사 메뉴고, 게다가 예약 없이는 못 먹는다는 한정판 김밥은 일종의 여행 전리품이 된다.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여행할 때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있는 동안 유명하다는 것, 맛있다는 건 모두 섭렵하고 돌아가야 100점짜리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여행은 만점을 맞아야 하는 시험이 아니라 어쩌면 일기를 쓰는 일에 가깝다는 사실을. 반복되는 일상에서 한 발짝 떨어져 더 오래 기억할 특별한 순간들을 채워 넣는다는 점에서 일기와 결이 같다. 그래서 잠자고 있던 감각들을 깨우는 일이 중요하다. 일상으로 돌아와 살다가 지치면 여행지에서 차곡차곡 쌓은 반짝하고 빛났던 순간들을 꺼내 본다. 그 기억이 힘을 주고, 다시 여행을 떠날 이유를 만든다. 그러면 여행 여행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부지런한 일개미 모드로 살게 된다.    

  

다시 육지로 돌아온 어느 날, 점심으로 보디빌딩 선수처럼 탄탄하고 매끈한 김밥과 마주했다. 김밥을 보자마자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들어 달력 앱을 켰다. 달력을 뒤적이며 그때 못 먹은 ㅇㄴㅈ 김밥이랑 ㄷㅈㅇㄴ김밥에 대한 먹어야 하는데... 언제가 좋을까? 짬이 나는 일정을 계산해 봤다. 그 순간 바닥났던 에너지가 서서히 채워진다는 걸 느꼈다. 이게 바로 사람들이 제주까지 가서 굳이 김밥을 먹는 이유겠지? 이런 마음이 모여 제주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김밥의 격전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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