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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Dec 15. 2021

휘발유를 부어 주신 A교수님께

계산기 너머에 사람이 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고, 이렇게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에서야 덜컥 편지를 보내니 놀라셨죠? 일단 양해부터 구해야겠네요. 시간이 덧없이 흘러서 교수님 성함이 기억나지 않아 부득이하게 A교수님이라고 칭하는 점 이해해 주세요. 형편없는 제 기억력을 탓해 주세요. 숨 막힐 듯 무더웠던 여름, 삼성동 코엑스 콩다방이요. 학회 참석차 잠시 서울에 오셨을 때, 바쁜 시간을 쪼개 잠시 쉬는 시간에 처음 인사를 드렸었는데... 그것만 기억나네요. 아마 똑똑한 교수님은 기억하시겠죠?   

     

그때 저는 답사를 위해 아프리카로 출국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어요. 얼떨결에 저개발 국가 어린이와 소외계층을 위한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되는 바람에 어떻게든 결과를 내야 하는 상황이었죠. 마침 적정기술(適正技術, appropriate technology)이란 단어가 눈에 들어왔어요. 주로 저개발국가 사람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개발된 그 기술로 특히 그 지역의 환경과 여건에 맞게 고안하는 게 포인트잖아요. 예를 들면 오염된 물을 정화해주는 필터가 들어 있는 생명 빨대(Life Straw), 전기 사용 대신 페달을 밟아 빨래통을 돌리는 페달 세탁기 같은 기술 말이죠. 출국은 다가오는데 방향을 잡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그 상황에 ’ 적정기술‘은 한 줄기 빛처럼 느껴질 정도였어요.


적정기술의 권위자로 교수님을 소개받아 처음 메일로 연락드렸을 때, 솔직히 만남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어요. 워낙 바쁘신 분이니까. 근데 무슨 내용인지 얼굴 보고 얘기하자고 하셨을 때, 든든한 지원군을 얻었구나! 내심 기대가 컸어요. 부푼 가슴을 안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고, 교수님 뵙고서야 제가 혼자 앞서갔구나 깨달았어요.


이제와 생각해 보면 몸을 반쯤 뒤로 젖혀 의자 등받이에 기댄 교수님의 자세만 봐도 알 수 있었는데... 그때 제 눈에 뭐가 씌었는지 아니면 애써 외면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겠네요. 제법 굵어진 머리로 가늠해 보면 교수님은 사실 거절하기 위해 그 자리에 나오신 거였더라고요. 낮과 밤의 큰 기온 차로 생기는 안개를 포집해 물을 만드는 방법부터 숯과 자갈, 모래 등을 이용해 더러운 물을 정수하는 방법, 바람이나 물의 낙차를 이용해 전기를 만드는 법 등 초등학생의 과학실험 같은 지극히 단순한 내용이 현지 사정에서 적합한지 궁금해하는 제가 얼마나 어이없었을까요? 전 이론도 경험도 없으니 기댈 곳은 권위자인 교수님뿐이었어요. 영업사원처럼 땀을 뻘뻘 흘리며 설명하는 제 목소리가 교수님의 왼쪽 귀로 들어가 단 1초도 머무르지 않고 오른쪽 귀로 빠져나오는 게 보이더라고요. 그제야 정신이 들었죠. 교수님을 향해 한없이 쏠렸던 제 자세를 고쳐 앉게 되더라고요. 그걸 느끼셨는지 그제야 처음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었죠.      


그거 해서 뭐하게요? 차라리 돈으로 줘요.      

이 말은 교수님의 의도대로 제 심장에 명중했어요. 충격에 숨도 쉬어지지 않고, 사고 회로가 멈추더라고요. 그 쉽고 빠르고 편한 방법을 몰라서 굳이 시간을 들여 만난 게 아닌데... 그냥 은행 가서 제작비를 환전하면 될 일을 전 왜 크게 만들려고 했을까요? 그걸 원했다면 애초에 피차 바쁜 시간을 쪼개 만날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건 분명 아니잖아요. 교수님은 그저 그럴싸한 그림이 필요한 방송국 놈들의 장난질 정도로 생각하셨을까요? 계산기를 두드려 봤을 때 마이너스인 프로젝트를 꾸역꾸역 실행하겠다는 방송국 놈들의 ’ 무모한 도전’쯤으로 여기셨을까요?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 방송국 놈들의 무식한 상상이라고 판단하셨던 걸까요? 뭐가 됐든 저희의 도전이 불가능 아니 비효율적이라고 조언해 주신 거였죠. 다만, 그 표현이 필요 이상으로 과격했달까? 달콤한 망상에 취해 있는 방송국 놈들을 정신 차리게 하려면 이 정도의 충격은 필요하다고 결론 내리신 거겠죠. 냉철한 교수님의 더없이 차갑고 현실적인 조언 덕이었을까요? 짧지만 강렬했던 교수님과의 만남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가슴속에서 결심이 활활 불타올랐어요. 무조건 성공하겠다.라고! 저만 들을 수 있는 크기로 조용하고 또 뜨겁게 다짐했어요. 그거 해서 뭐하냐? 돈으로 주라는 교수님의 그 말이 제게 휘발유가 되었거든요.    


그 후 대학 졸업 논문을 이 정성으로 썼다면 아마 수석 졸업을 맡아 놨을 정도로 열심히 매달렸어요. 중간중간 어려움도 있었지만 제가 원했던 메시지가 방송에 담겼어요. 물론 100%는 아니지만. 시청률도,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제야 마음이 놓이더라고요. 수도도, 전기도 없는 곳에서 거지꼴로 보름 넘게 버티며 쌓은 고생들이 씻은 듯 사라졌어요. 지구 반대편의 현실과 희망을 전하고 관심을 끌어내겠다는 목표로 시작한 프로젝트. 거의 반년을 투자한 프로젝트가 제법 해피엔딩이 됐거든요. 다 교수님 덕분입니다. 감사해요.      


무엇보다 그 프로젝트를 통해 제가 얻은 최고의 수확이 있어요. 바로 <계산기 너머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죠. 평생 뿌연 부유물이 가득한 물을 마셔온 아이에게 생수 몇 병을 사주는 것보다 맑은 물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아는 교수님이시잖아요. 그게 비록 카메라가 돌아가는 그 순간일지라도 그걸 시도하고 또 경험을 해 본 아이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죠. 그 과정을 지구 반대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마음을 움직여 관심과 지원을 끌어내는 일. 그게 제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었죠. 교수님께는 그저 치고 빠지는 비효율적인 일회성 이벤트로만 보였겠지만, 코웃음 치셨던 그 일이 제가 할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계산기 너머에 사람이 있다>라는 교훈은 교수님이 알려주신 거예요. 그때 그 말을 해주지 않으셨다면 그토록 열정적으로 달려들진 못했을 거예요. 교수님도, 저도 자기 자리에서만 보였던 게 있겠죠. 우리의 생각은 달랐지만, 교수님은 교수님의 자리에서, 저는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잖아요. 그래서 그 어떤 감정보다는 감사함이 더 커요. 그날의 만남 이후 뭔가를 시작할 때 전문가에게 무조건 기대기보다 제가 먼저 바르고 굳은 확신과 신념을 채우기 위해 일단, 공부부터 하는 습관이 생겼거든요. 수십 년 쌓아온 전문가의 내공은 넘어설 순 없겠지만 따라잡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하는 수밖에 없더라고요. 생각의 전환점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그때 휘발유가 제 온몸을 흠뻑 적신 교수님의 그 한 마디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겠죠.      


지금도 종종 그날들을 떠올려요. 미치광이 같은 야생 원숭이 울음소리를 모닝콜 삼아 눈을 뜨고, 눈곱만 겨우 떼고 텐트 밖을 나와 간밤에 얼마나 많은 물이 포집기에 모였는지 확인했던 날들 말이에요. 보잘것없는 결과라도 어제보다 조금 더 모였다는 사실에 실망하기보다 희망을 이야기하던 그때요. 그날의 기억들은 저를 계산기로 두드려 효율과 비효율로 무 자르듯 가르지 않아도 분명 가치가 있다는 메시지를 가슴에 품고 살게 만듭니다. 털썩 손을 놓고 싶은 순간에도 손에 힘을 꽉 주게 하는 그 메시지요. 교수님 덕분에 저는 한층 더 단단한 사람이 되었어요.      


지금도 여전히 많은 학생의 존경을 받으며 수업을 하시고, 또 자신만의 연구를 하고 계시겠죠? 오늘보다 더 나은 모두의 내일을 위해 쉼 없이 달려가고 계실 교수님을 뜨겁게 응원할게요. 늘 건강 잘 챙기셔서 오래오래 사람들의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좋은 연구 많이 해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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