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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Dec 22. 2021

중랑천의 터줏대감, 냥선생님께

우리 곁의 길고양이들이 사는 법

    

냥냥이 선생님 안녕하세요. 수년째 얼굴을 뵙고 수줍은 인사를 던지고 지나가는 인간 1입니다. 냥냥이 선생님을 누군가는 나비, 또 다른 누군가는 야옹이라고 부르더라고요. 이 구역의 슈스답게 여러 개의 활동명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야매 작명가, 제멋대로 지은 이름 냥냥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드시지 않아도 어쩔 수 없어요. 제게는 이미 냥냥이니까요. 그 흔한 추르 한 번 내밀지 않았는데도 매번 눈인사와 손인사를 보낼 때면 도망가거나 피하지 않고 ‘므야옹’ 하고 답해 주실 때마다 감개무량합니다. 선생님께서 저를 기억하고 있구나 싶어서 한결 따뜻해진 마음을 품고 산책을 이어가곤 합니다.      


중랑천을 따라 만들어진 산책로의 오래된 청과물 도매 시장 바로 아래 공영 주차장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죠. 사실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네요. 다만 선생님께서 지금보다 절반의 풍채였다는 사실은 확실히 기억합니다. 길 생활의 연차가 쌓일수록 뱃살도 늘어나는 거겠죠? 마치 나무의 나이테처럼. 만난 지는 오래됐는데 처음으로 냥선생님께 편지를 씁니다. 편지를 쓰는 이유요? 오랜 거리 생활 탓인지 윤기가 사라진 털 빛을 보며 슬쩍 걱정이 차올랐기 때문입니다. 길고양이의 평균 수명이 4년이라는데 우리가 본 지는 4년도 훌쩍 넘었으니까요. 당연히 냥선생님의 만수무강을 빌지만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는 게 거리 생활이잖아요. 더 늦지 않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어서 이렇게 주절주절 편지를 씁니다.      


산책할 때마다 냥선생님이 계신 곳이 가까워지면 느긋했던 눈과 발이 바빠집니다. 오래 주차된 큼지막한 낡은 트럭 아래 무성한 잡풀 사이. 그곳에서 파전처럼 푸짐한 뱃살을 펼쳐 놓고 졸고 있는 냥선생님을 찾기 위해서죠. 대부분 어김없이 그 자리에 계시지만 안 계시는 날에는 걱정이 앞섭니다.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길 위의 위험들이 냥선생님을 불쑥 덮친 게 아닌가 싶어서요. 하지만 멀지 않은 곳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무심히 구경하다가 졸기를 반복하는 냥선생님을 확인하고서야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냥선생님이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견뎌 냈구나 하고 마음이 놓입니다.      


고양이 세계에서 얼굴 크기는 곧 서열이라고 했던가요? 냥선생님 얼굴 사이즈를 보면 대장 중의 대장이 아닐까 감히 예상해 봅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털 날리는 영역 싸움과 먹이 다툼이 벌어지는 그곳에서 수년째, 그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고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보면 냥선생님의 파워가 보통은 아니겠구나 느낍니다. 제 걱정이 사치라고 느껴질 만큼 험난한 길 위의 생활에도 이골이 난 거겠죠?   

   

전 수년 째, 냥선생님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데요. 찬찬히 생각해 보면 냥선생님은 참 많은 사랑을 받는 고양이더라고요. 아침이면 바퀴 달린 장바구니 가득 사료와 물을 챙겨 와 근처 길고양이를 챙기는 아주머니의 보살핌을 받고, 점심이면 주머니에 낚싯대 모양 장난감을 챙겨 와 놀아주는 젊은 청년이 있죠. 저녁이면 반려견 산책을 시키다가 가던 길을 멈추고 냥선생님 엉덩이를 두드려 주는 분도 있고, 지친 퇴근길 핸드백에서 간식을 꺼내 내미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삼시 세끼 저보다 더 잘 챙겨 드시는 냥선생님을 볼 때면 냥선생님이 온몸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 같아요.     


나는 귀여운 척하는 게 아니라 귀엽게 태어난 건데 어쩌라냥?

나는 뚱뚱해도 귀엽지만, 너희 인간들은 아니란다냥


냥선생님은 느긋하게 햇빛 샤워나 하면서 하찮은 인간들이 먹을거리를 바치기를 기다린다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겠죠. 그건 아니라는 걸 저는 잘 압니다. 애정과 관심을 구걸하는 게 아니라 그 누구보다 부지런히 자신을 가꾸고 단련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한 시간에는 세심하게 털을 고르고, 챠밍 포인트인 뱃살을 사람들의 눈에 띄게 펼칠지 이리저리 자세를 고쳐 잡잖아요. 그 철저하고 섬세한 자기 관리는 세계적 슈퍼모델급이라더라고요. 낯선 사람이 오면 잔뜩 털을 세워 경계하지만,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는 사람 근처에 오면 그냥 지나칠까 걱정돼 중저음의 ‘므야옹’ 소리를 내서 존재감을 알리죠. 사랑받는 방법을 아는 현명한 냥선생님을 보며 한 수 제대로 배웁니다.


저는 세상을 꽁꽁 얼려 버릴 혹한이 오면, 모든 걸 쓸어 버릴 무서운 기세의 태풍이 불면, 장마로 물이 넘치면, 숨 막힐듯한 더위가 이어질 때면 산책을 가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산책로를 집 삼아 사는 냥냥이 선생님의 안위가 궁금해집니다. 어떻게 지내실지 걱정되어 며칠 잠을 뒤척입니다. 중랑천에 나가는 게 제게는 냥냥이 선생님에는 삶의 터전이니까요. 날카롭게 일상을 할퀴던 날씨가 잠잠해지면 전 다시 산책로로 나오죠. 피라미드를 지키는 스핑크스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서 냥선생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식빵을 굽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그 평화로운 표정 안에 얼마나 많은 상처와 눈물이 켜켜이 쌓여 있을까요?       


새해가 코앞이네요. 신흥 세력들이 치고 올라와도, 약삭빠른 비둘기들이 호시탐탐 먹이를 노려도 오래도록 굳건하게 그 자리를 지켜 주시길 빕니다. 부디 이 편지가 마지막 편지가 되지 않길 간절히 바랍니다. 또 편지를 할 때까지 인자한 그 미소를 보내주세요. 사는 동안 늘 무탈하시고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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