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사 Dec 29. 2021

애증의 빈혈 선생님께

빈혈은 그만 졸업합니다


      

날씨가 무척 춥네요.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한동안 빈혈 선생님의 존재를 잊고 살았어요. 그런데 연말이라 그런가? 선생님께 감사의 편지를 쓰고 싶어 졌어요. 2021에 많은 일이 있지만, 선생님과의 만남은 저의 삶 구석구석을 참 많이도 바꿔 놨거든요. 그래서 올해가 마무리되는 이 시점에 꼭 편지를 드려야겠다 다짐했고, 이렇게 실행하게 됐어요.      


처음 선생님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지난여름이었어요. 두통과 현기증이 심해지고, 이곳저곳 컨디션이 나빠져서 병원을 찾았을 때였죠. 검사지를 한참 들여다본 의사의 입을 통해 빈혈 선생님께서 제 몸을 구석구석 망가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잖아요. 그저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여름이니까, 체력이 딸리니까, 에너지가 좀 모자라서 전반적으로 컨디션이 나빠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길고 복잡하고 비싼 검사 끝에 이 증상의 병명이 ‘빈혈’이라는 걸 알게 됐죠.     


빈혈... 이름은 수없이 들었죠. 순정만화나 하이틴 영화, 슬픈 드라마 속 파리한 얼굴의 가녀린 주연이 쓰러질 때 으레 따라오는 미디어 속 흔한 병. 사람들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병. 그런 이미지의 병이잖아요. 하지만 전 그들처럼 어리지도 가냘프지도 보호 본능을 자극하지도 않는다는 걸 잘 압니다. 그저 철분이 모자란 사람이죠. 각종 미디어가 만든 ‘빈혈’이라는 병의 이미지와 현실은 달라도 참 많이 다르더라고요. 지난해 빈혈 때문에 병원을 찾은 사람이 무려 60만 명에 가깝다고 하니, 빈혈은 실제로도 흔한 병이더라고요. (출처 :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생각해 보면 빈혈 선생님은 어느 날 갑자기 저를 찾아온 게 아니었어요. 성인이 되고, 다른 친구들을 따라 헌혈의 집에 간 적이 있어요. 저보다 더 날씬하고 가냘픈 친구들도 척척 헌혈하는데 저는 안된다고 하더라고요. 몇 번 시도해 봤는데 매번 약지 손가락만 찔러본 후 거절당하니 억울해서 나중에는 그냥 포기하게 되더라고요. 왜 나는 안 되냐고 간호사님께 물어봐도 그저 기준보다 수치가 낮아서라고만 하셨어요. 그때는 막연히 ‘난 뭔가 모자란 인간이구나 ‘ 생각했어요. 그때도 이미 빈혈 선생님은 제 몸에서 상주하고 계셨던 거죠.


늘 머리가 무겁고, 휘청이고, 종종 팔다리가 저린 증상이 일상이었어요. 그저 늘 그랬으니까 그러려니 하며 살았었죠. 하지만 전문의의 입을 통해 제 몸에 빈혈 선생님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후 자신을 좀 더 세심하게 관찰하게 됐어요. 몸이 보내는 크고 작은 경고 신호에 귀 기울이게 된 거죠. 운동도 꼬박꼬박 하고, 과음도 하지 않고, 몸에 나쁜 음식들은 많이 먹지 않으니 꽤 신경을 쓰고 산다고 착각한 거죠. 잠을 잘 자지 못했고, 식사는 평소에는 딱 허기만 지울 만큼 먹다가 땡길 때만 왕창 먹었어요. 영양소를 골고루 먹는 일에도 무신경했으니까요.


처방받은 빨간색 빈혈약 한 뭉텅이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온 그날 이후 좀 많이 변했어요. 약을 먹어야 하니 아침저녁 밥을 잘 챙겨 먹게 됐고, 철분이 많이 들어 있다는 고기도 꼬박꼬박 먹었어요. 그렇게 식사도, 운동도, 잠도, 약도 잘 챙긴 지 6개월이 넘어가던 시점이었죠. 빈혈 약이 떨어져서 약 처방을 위해 병원에 갔다가 의외의 소식을 들었어요. 담당 의사는 말하더군요. 단호하고 활기찬 목소리로!   

  

빈혈 졸업!

분명 처음 빈혈 진단을 내렸을 때는 길고 지루한 싸움이 될 거라고 말했었는데 이토록 빨리 빈혈 선생님과의 결별을 확인해 주실 줄 몰랐죠. 뭐 언제든 찾아오실 빈혈 선생님이니 꾸준히 관리하라는 당부를 덧붙이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밥도 잠도 잘 챙기고 있습니다.

     

처음 진단받았을 때 사실 빈혈 선생님을 원망했어요. 시간도 없고, 갈 길도 먼데 하필 지금 찾아오셨을까 하고. 하지만 생각해 보니 다 이유가 있더라고요. 내달리기만 하면 목포에 닿을 거라 생각했던 어리석은 절 붙잡아 주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폭주 기관차처럼 달려만 가는 절 잡아주기 위해 빈혈 선생님이 브레이크를 잡아 준 거죠. 아마 그 상태로 달리기만 했다면 분명 목표 점에 닿기도 전에 고꾸라져 만신창이가 됐겠죠. 그때 절 붙잡아 주셔서 감사해요. 목표가 생기면 뒤도 옆도 안 돌아보고 돌진만 하는 한없이 단순하고 무식하고 지랄 맞은 제게 빈혈 선생님은 필요한 존재였어요. 세상에 모든 일 중 이유 없이 생기는 일이 없고, 필요 없는 일은 없나 봅니다. 실패도, 시련도, 슬픔도 다 쓸모가 있는 거죠.    

 

새해가 코 앞이네요. 2022년에는 어떤 일들이 절 기다리고 있을까요? 아무리 바쁘고 정신없더라도 제 몸을 우선 챙겨 가며 살게요. 또 언제 불쑥 빈혈 선생님이 제 일상에 발을 불쑥 내밀지 모르니. 빈혈 선생님과의 잠깐 동안 이별이 아닌 영원한 결별을 위해 부지런히 살겠습니다.   









예스 24

교보문고

인터파크

영풍문고

알라딘

카카오톡 선물하기


매거진의 이전글 중랑천의 터줏대감, 냥선생님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