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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an 24. 2022

주황색 패딩 점퍼를 버리며

한없이 차가웠던 첫 파리 여행의 기억


버릴 만한 옷을 입고 오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만큼 일이 험해 멀쩡한 옷 입고 왔다가 망가질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걱정을 겸한 조언이었다. 옷장을 뒤지다 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두운 구석에서 주황색 패딩 점퍼 하나를 발굴(!)했다. 이게 언제 적 옷이었더라? 언제부터 여기에 박혀 있었는지 기억조차 없다. 적어도 최근 7~8년 안에는 입은 적이 없는 옷이다. 달력의 숫자가 수없이 바뀌는 동안 그 자리에서 화석처럼 버티고 있었던 녀석이었다. 아니 내 기억 속에서 존재 자체가 지워진 옷이다. 입을 만한 옷인가 확인하기 위해 몸을 구겨 넣었다. 요즘 스타일의 핏은 아니지만 입는 데는 문제없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니 글씨가 다 날아간 영수증 하나가 나왔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더듬더듬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니 15년도 훌쩍 지난 처음 그 옷을 입었던 시절의 기억이 번쩍 손을 들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유럽 땅을 밟은 건 20대 중반의 일이었다. 쫄보 중의 쫄보라 대학 시절에는 감히 해외를 나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유학은커녕 그 흔한 휴학도, 어학연수도 한번 없이 순리대로 정직하게 졸업했고, 곧바로 취업을 했다. 지옥길을 걷는 것 같았던 어리바리한 사회 초년병 시절도 끝이 보였고 내 아래로 후배도 하나둘 늘었다. 정신없이 살다 보니 그제야 한숨 돌릴 때가 왔다. 마침 진행하던 프로젝트도 잘 마무리됐고, 그 시기에 어학연수 중이던 친구의 방학을 맞아 런던으로 향했다. 크리스마스부터 새해까지 런던과 프랑스를 여행할 계획이었다. 그 주황색 패딩을 입고 의기양양하게 런던 히스로 공항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뭐가 단단히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고작 일본과 동남아 근교만 다녔던 내가 난생처음 밟은 유럽 땅. 그곳의 겨울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었다. 뉴스고 어디고 다들 한국이 제일 춥다고 했으니 유럽의 겨울이 추워 봤자 얼마나 춥겠어? 이런 안일한 생각으로 짐을 꾸리고 옷을 챙겼다. 게다가 그때의 난 피가 뜨거운 20대가 아니었던가? 그까짓 건강보다는 멋이 중요했고, 보온보다는 핏이 중요했다. 나름 거금을 들여 장만한 그 주황색 패딩 점퍼는 서유럽 겨울의 기세 앞에 한낱 천 쪼가리에 불과했다. 런던에서는 친구 옷을 빌려 입으며 버텼다. 문제는 프랑스. 시작은 단순했다. 당시 또래들처럼 로망의 도시, 프랑스 파리에만 가려고 했다. 파리만 둘러봐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았다. 그러다 덜컥 일이 커져 런던 일정보다 더 길게 프랑스 여행을 하게 됐다. 파리를 시작으로 설경이 그림 같던 스위스 옆 동네 안시, 지중해와 맞닿은 남부 휴양지 니스로 이어지는 야심 찬 계획이 있었다. 습자지만큼 만큼 얇은 주황색 패딩 점퍼를 하나에 의지해서 프랑스 여행을 시작했다.       


전 세계에 ’ 시크하다 ‘라는 느낌 있는 단어로 포장되어 있던 파리지엥들이 내뿜는 냉소 때문일까? 여행계의 하룻강아지를 혼내기라도 하듯 12월 말 파리의 추위는 매서웠다. 삼보일똥 즉 세 걸음 걸으면 1개똥을 밟을까 한껏 긴장하게 되는 파리의 거리. 어딜 가든 넘쳐나는 관광객으로 어깨 치기가 일상이었고, 나 파리 좀 다녀왔다 인증샷 찍기에 혈안이 된 동행의 폭주에 다리는 너덜너덜했다. 관광객의 본분에 충실해 이른 아침부터 막차가 끊기기 전 늦은 밤까지 알뜰하게 쓰고 돌아온 숙소는 냉골이었다. 손바닥만 한 라디에이터에서 흘러나오는 가녀린 온기로는 한국산 냉동 주꾸미들을 해동시키기는 불가능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당시 신용카드도 없었고, 환전해 온 돈도 정해져 있으니 새 옷을 사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옷이란 옷은 있는 대로 다 껴입고, 마지막으로 주황 패딩 점퍼의 지퍼를 목 끝까지 힘차게 올리는 것. 그리고 따끈한 커피 한 잔과 빵을 아침저녁으로 씹으며 뜨끈하게 지질 수 있는 한국식 찜질방의 온기를 그리워하는 것뿐이었다. 눈이라도 오면 낭만이라도 있지. 연일 우중충한 하늘에서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지긋지긋한 파리를 뒤로하고, 겨울 왕국 같던 도시 안시를 거쳐, 따스한 니스의 품에 안기고서야 알게 됐다. 내가 입고 있는 주황색 패딩은 한겨울 평균 기온이 영상 10도 정도로 유지되는 지중해성 기후의 니스에서나 어울리는 옷이라는 걸.


생각해 본다. 많은 사람에게 낭만이 흘러넘치는 도시로 기억되는 파리를 고작 ’ 개똥‘과 뼛속까지 시리던 '추위’ 단 두 단어로만 기억하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겨울이면 또 하나의 피부처럼 부착하고 다니는 발열 내의와 바람 한 톨 안 들어가는 두꺼운 패딩 점퍼로 중무장하고 파리를 여행했다면 어땠을까? 지금만큼의 파리에 대한 악감정은 품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없는 돈을 쪼개 민박집에서 나눠준 쿠폰을 먹여가며 어렵게 센강 유람선을 탔다. 분명 현실이지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던 파리의 야경 따위는 오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따귀를 때리듯 매섭게 몰아치는 파리의 겨울 칼바람에서 도망쳐 뜨끈한 전기장판 위에 배 깔고 엎드려 귤이나 까먹으며 뒹굴뒹굴하고 싶었다. 몽마르트르 언덕 근처 반 고흐의 단골 카페에서 그가 그랬던 것처럼 몸은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지만, 정신은 지구 반대편 난방 빵빵한 한국의 카페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춥고, 춥고 또 추웠던 파리. 그래서일까? 단지 날씨가 추웠을 뿐인데 가난한 초보 여행자에게 파리의 사람도, 음식도, 분위기도 한없이 차가운 곳으로만 기억에 남았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면서 생각했다. 내 인생에 두 번의 파리는 없다고. 프랑스의 다른 도시는 가도 파리는 오지 않겠다 다짐했다.      


하지만 역시 다짐대로 되지 않는 게 바로 사람 일. 그로부터 10년 후 나는 다시 파리를 지났다.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파리 샤를 드골 국제공항에서 환승해야 했다. 얼마나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곳을 오갔던 걸까?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던 직원은 내게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다. 그전까지 <파리 = 차가운 도시>로 냉동 박제된 기억이 그 직원의 미소 가득한 한국어 인사 한마디로 스르르 녹아 버렸다. 여전히 파리를 다시 여행할 생각은 없지만, 파리에 대한 이미지는 한겨울에서 초봄 정도로 따뜻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직항보다는 경유하는 항공편을 택할 만큼 여전히 통장은 혹한기지만 웃으며 인사를 받아 줄 만큼 마음의 온기와 여유는 충분한 사람이 됐다.


집을 나서며 주황색 패딩 점퍼를 챙겼다. 대문에서 30m 거리에 있는 초록색 헌 옷 수거함의 블랙홀 같은 까만 구멍에 밀어 넣었다. 파리의 차디찬 겨울 추위를 감당해냈던 연약한 패딩과 헤어질 때가 왔다. 지금의 나는 20대의 나보다 추위를 더 타는 나약한 몸이 됐다. 게다가 멋보다는 생존이 중요한 사람이 됐다. 이제 주황색 패딩 점퍼는 가지고 있는다고 다시 입을 일이 없는 옷이 된 거다. 파리의 찬 겨울 공기를 머금었던 주황색 패딩 점퍼는 어디로 가게 될까? 혹독하기 짝이 없던 겨울 파리의 시린 기억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아 몇 번 입지 않았던 점퍼. 못난 주인을 떠나 새 주인을 만나게 된다면 부디 세상 구경 자주 하는 옷이 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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