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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Dec 20. 2021

눈 오는 겨울, 서귀포에 가면

눈이 오면 당장 달려가야 할 서귀포의 설경 맛집


   

우리나라 땅에서 횟수로만 쳤을 때, 압도적으로 자주 간 여행지는 서귀포다. 내가 숨 쉬는 경기도 북부에서 제일 먼 땅, 제주. 그곳에서도 한참 남쪽으로 내 달려야 닿는 동네가 서귀포다. 보통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 섬이라는 특수성도 있지만, 한국 땅에서 거의 끝에 가까운 물리적 거리가 주는 심리적 위안이 크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매서운 추위를 피해, 복잡하고 속 시끄러운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 멀리 도망쳤다는 사실이 묘한 쾌감을 안겨 준다.       


색도 향도 각기 다른 서귀포의 모든 계절을 사랑하지만, 그중에서도 툭하면 발이 닿게 되는 계절은 역시 겨울이다. 수해째 새 달력이 시작되는 때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서귀포로 튄다. 하얀 눈 모자를 눌러쓴 기골이 장대한 한라산 할아버지와 초록 나무 사이 주렁주렁 열린 귀여운 주황 귤 손자들을 멍하니 보며 서귀포의 겨울을 만끽한다. 지난했던 한 해를 무사히 살아낸 나를 칭찬하고, 또 새롭게 시작하는 한 해를 살아갈 나를 응원하는 시간이다. 운동선수들의 단골 동계 전지훈련지로 꼽힐 만큼 기온이 따듯한 서귀포. 보통은 눈이 내리기 무섭게 녹지만, 눈 내리는 서귀포는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자연이 만든 명화 속 주인공이 되고 싶다면 이곳을 찾아가 보자. 단, 변덕스러운 섬 날씨에 대비해 기상 정보 안내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이며.       

고살리 숲길

개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고살리 숲길은 제주 곶자왈 숲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숲길이다. 편도 2.1km 정도로 왕복 2시간 정도로 평소에도 산책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그다지 부담스러운 길은 아니다. 초입은 비교적 정비가 잘 되어 있지만,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도 숲 요정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깊은 생(生) 날 것의 길이 펼쳐진다. 아무리 실력 좋은 공간 연출가라도 사람 손으로 이렇게 만들긴 불가능하지 않을까? 감탄하곤 한다. 그야말로 자연의 시간이 만들어 낸 정교한 숲이다. 보통의 산책로 데크처럼 길이 평탄하지 않아 SNS용 인생샷 촬영보다는 호젓한 사색이 더 어울리는 숲이다. 그래서 바닥이 두꺼운 운동화나 트레킹화를 갖춰 신으면 이 숲의 진가를 방해받지 않고 누릴 수 있다. 고살리 숲 곳곳에는 오랜 옛날, 용암이 되어 흐르다 멈춰 만들어진 돌과 각종 나무뿌리들이 기묘한 모양으로 얽혀 있다. 중간중간 오래된 귤밭이나, 말 방목장이 있지만, 사람의 흔적을 찾긴 어렵다. 사람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훼손이 덜 됐다는 의미다. 들리는 거라고는 눈이 나무 위에 소복이 쌓이는 소리와 가끔 숲의 적막을 깨는 하이톤 새소리뿐. 이 소리에 이끌려 정신없이 걷다 보면 자칫 길을 잃을 수 있다. 그러니 일정 거리마다 표시해 둔 보라색, 하늘색 고살리 숲길 리본을 잘 따라가야 한다.      



서귀 다원

고살리 숲길에서 멀지 않은 곳(3.5km 거리)에 눈 내린 서귀포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는 숨은 보석 같은 곳이 있다. 2만여 평의 감귤밭을 차밭으로 바꿔 40년간 일궈온 80대 노부부가 운영 중인 <서귀 다원>이다. 대기업의 자본이 들어간 세련된 차밭이 아니라, 개인이 운영하는 한적하고 조용한 차밭이다. 용맹한 경비병처럼 우뚝 선 삼나무와 까만 현무암 돌담이 든든하게 지키고 있는 이 차밭은 한겨울에도 차나무들이 잔디처럼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녹차 티라미수 위에 하얀 슈가 파우더를 뿌린 듯 차나무 위에 소복이 쌓인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해묵은 근심과 고민이 통편집된 듯 사라진다. 풍경에 취한 몸을 녹이고 싶다면 차밭 한가운데에 있는 다실로 향한다. 이 차밭을 가꾸는데 젊음을 바치느라 이젠 머리 위에 하얗게 눈이 내려앉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기다린다. 차밭을 가득 담은 통창 바로 앞 테이블에 앉으면 차를 내주신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직접 우린 부드러운 우전 녹차와 황차를 맛볼 수 있다. 새콤달콤한 귤 정과는 보너스. 유리병 가득 내어주는 넘치는 차 인심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끝없이 펼쳐진 차밭 풍경을 안주 삼아 홀짝홀짝 차를 마신다.  


  

    

고근산

서귀포 시민들의 새해맞이 명소로 꼽히는 고근산은 서귀포 제2청사가 있는 혁신도시 쪽에 있다. 높이 396m로 쉽게 말해 시민들이 아침저녁으로 운동 삼아 산책하듯 오르는 야트막한 동네 뒷산이다. 초입부터 깔끔하게 정비된 등산로는 삼나무, 편백나무, 해송 등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세련된 혁신도시에서 벗어난 지 분명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웅장한 나무들의 위용에 마치 (가보지도 않은) 북유럽의 어느 숲길 한복판으로 순간 이동을 했나? 착각할 정도다. 숨바꼭질하던 올라프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분위기다. 줄기, 가지 할 것 없이 눈을 뒤집어쓴 장대한 나무들의 응원을 받으며 오르다 보면 금세 전망대에 도착한다. 주변에 높은 건물이나 산이 없어서 시야가 탁 트인 정상.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산 바로 아래의 초록 귤밭, 회색 아파트 단지, 검은 점처럼 떠 있는 섬을 품은 푸른 남쪽 바다가 켜켜이 쌓여 있는 풍경이 펼쳐진다. 고근산은 비교적 적은 시간과 에너지만 들이고도 눈 내린 서귀포의 정취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카페 와일드 가든

감귤의 땅 제주에서, 특히 전국 감귤 생산량의 70%가 나온다는 서귀포에서 눈(目) 닿는 곳곳마다 감귤밭이 있다. 단순히 귤을 키우던 감귤밭은 어느새 체험 농장으로, 음식점으로, 카페로 진화 중이다. 발에 챌 만큼 많은 감귤밭을 품은 공간이 많지만, 이번 겨울 눈(雪) 내린 풍경이 기대되는 카페가 한 곳 있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을 쌓인 모습을 보진 못했지만, 다음에 눈이 내리면 꼭 가리라 점찍어 둔 곳이다. 등 뒤로 감귤밭이 감싸고 있고, 가슴으로 서귀포 앞바다를 (소소하게) 품고 있고 카페 <와일드 가든>. 눈이 없는 풍경도 그림 같은데 눈까지 더해진 모습에 설명을 덧붙이는 건 입이 아플 정도다. 루프탑에 내려다보는 한라산이 품은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감귤밭은 어떤 모습일지 벌써 궁금해진다. 그래서 귤이 다 떨어지기 전에 서귀포에 가겠다고 다짐한다. 하얀 눈과 주황 귤이 공존하는 서귀포의 시간은 짧디 짧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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