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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Dec 10. 2021

겨울에 먹는 조개 전골의 위험성

순박한 얼굴에 그렇지 않은 내공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국물 없이는 밥을 못 넘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굳이 택하자면 난 후자에 쪽에 가깝다. 국, 찌개, 탕 등 국물 없이 퍽퍽한 맨밥을 잘 넘긴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국물 요리를 굳이 챙겨 먹진 않는다. 건더기만 건져 개인 그릇에 담는다. 국물을 담아도 일부러 더 넣는 게 아니라 건더기가 머금고 있는 수분 정도다. 내게 국물은 발목 아니 발바닥만 살짝 적실 정도면 충분하다.


하지만 겨울이 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뜨끈한 국물 생각이 간절하다. 뼛속까지 차곡차곡 쌓여 있던 한기가 밀려오면 하얀 김을 내뿜으며 팔팔 끓는 국물을 숟갈 가득 뜬다. 후후 불어 한 김 식힌 후 국물을 입에 넣어 보지만 여전히 용암처럼 뜨겁다. 입안 껍질을 홀랑 벗긴 것도 모자라 무서운 기세로 식도를 타고 흐른다. 몸 안 내장 곳곳으로 퍼지는 뜨끈한 국물을 느낄 때면, 입에서는 이 말이 튀어나온다.      


겨울에는 역시 뜨끈한 국물이지    

조개와 해산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가마솥 크기의 조개 전골냄비를 앞에 두고 난 ’또‘ 이 말을 조용히 읊조리고 있었다. 명동의 한 백화점 건물을 조명으로 화려하게 꾸민 크리스마스 장식을 구경한 후였다. 번잡스러운 명동 대신 한적한 무교동 뒷골목으로 향했다. 주말이라 더없이 조용한 빌딩 숲 사이에서 잠시 방황했다. 소중한 겨울, 오늘의 저녁 메뉴로 뭘 먹어야 할까? 짧은 고민 끝에 지도 앱에서 발견한 평점 4.5의 조개 전골 전문점의 문을 열었다.        


평일이었다면 반주를 곁들여 저녁 식사하는 넥타이 부대들로 복작였을 이곳. 주말이라 군데군데 테이블은 비어 있었지만, 직원 혼자 감당하기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근처 청계천이나 명동을 구경하고 왔음직한 가족 단위 손님부터, 오랜만에 모인듯한 소규모 지인 모임을 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있었다. 메뉴판을 받아 들었지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의 답은 쌀쌀한 날씨와 딱 어울리는 메뉴, 조개 전골이었다.      


잠시 후, 가녀린 체구의 직원을 다 가릴 만큼 거대한 냄비가 우리 앞에 놓였다. 맥주로 입만 살짝 적시자고 합의했지만 냄비의 스케일을 보는 순간, 맥주로만은 감당할 수 없겠다는 직감이 들불처럼 번졌다. 술을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런 훌륭한 전골냄비를 앞에 두고 맥주로만 끝낸다는 건, 우리를 위해 희생한 조개들에게 못 할 짓이었다. 이런 합리적(?) 이유를 소환하며 재빨리 소주를 추가했다. 각자의 주량에 맞게 소주와 맥주가 섞이자 아름다운 빛깔의 소맥이 탄생했다. 이로써 조개전골을 영접할 모든 준비를 마쳤다. 


우리가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크고 작은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도 성실하게 끓던 조개 전골의 뚜껑이 열렸다. 냄비 안에서 만개한 꽃처럼 입을 활짝 벌린 조개들이 우리를 반겼다. 배추 이불 위에 키조개, 가리비, 동죽, 석화, 진주담치, 오징어, 새우, 어묵꼬치, 치즈 퐁듀 뚝배기까지... 용왕님의 보석함을 육지로 옮겨 온 듯 어마어마한 양과 종류의 조개 전골의 자태. 일단 스케일에 압도당했고, 바다 내음에 취했다. 이 설렘이 사라지기 전에 일단 국물부터 떠서 한 입 넣었다. 뜨거움을 느낄 새도 없이 입안에 뜨거운 파도가 거세게 몰아쳤다. 천년 묵은 한도 씻어 내릴 시원하고 칼칼하고 감칠맛 넘치는 맛. 초대형 냄비 안에서 각종 조개가 종류를 초월해 한 마음으로 열과 사투를 벌이며 쏟아냈을 육수를 한 방울 한 방울 음미했다. 그들이 쏟아냈을 열정들을 물먹는 하마처럼 빨아들였다. 앞서 말했던 국물 없이도 밥 잘 먹는 사람이라는 단언이 무색할 만큼 조개 전골 국물을 들이켰다. 냄비에 가뭄이 나기 직전, 겨우 바쁘게 움직이던 숟가락을 멈췄다. 칼국수 사리를 추가해 그날의 코스를 마무리했다. 날이 차가워져야, 겨울이 되어야 비로소 존재감이 빛나는 음식, 조개 전골. 오늘의 메뉴를 제안한 나님을 스스로 한껏 칭찬하며 막잔을 들어 올렸다.      


마성의 조개 전골에 제대로 배신을 당했다는 걸 알게 된 건 다음 날 눈을 뜨는 순간부터였다. 술을 마셨으니 몸이 무거운 건 필연이었지만, 눈이 버겁게 떠질 줄은 몰랐다. 문제는 붓기. 평소에도 잘 붓는 체질이었다면 또 그러는구나 하고 넘기겠지만 난 평소 잘 붓는 체질이 아니다. 그러니 조개 전골이 남긴 뜻밖의 선물이 영 불편했다. 감칠맛에 제대로 홀려 있던 나는 다음날 날 덮칠 ’ 붓기‘를 상상할 수 없었다. 건조한 사막을 헤매다 만난 오아시스처럼 더없이 반가웠던 조개 전골은 무시무시한 양의 나트륨을 품고 있었다. 나만 이런 부작용(?)이 난 건가 싶어 그 자리를 함께했던 지인들에게 괜찮냐고 톡을 보내니 모두 붓기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거울 속 2배가 된 얼굴을 보며 다들 낯설어하고 있었다. 조개 전골이 이토록 위험한 음식이었다니... 우리는 모두 적지 않은 충격에 휩싸였다.      


언젠가 「무심코 먹다가 뒤통수 맞는 음식」에 관한 기사를 본 적 있다. 나트륨 함유량 부문에서 칼국수가 대표 음식 중 하나로 꼽혔다. 기사 제목만 보고도 심심하기 짝이 없는 음식, 칼국수가 그럴 리가 없다고 눈을 비비고 기사를 꼼꼼히 살펴봤다. 내 바람과 달리 그건 사실이었다. 나트륨 함량을 비교하면 김치찌개(1962㎎)보다 해물칼국수(2355㎎)가 더 높았다. 국물은 물론 밀가루 반죽에도 들어 있는 나트륨. 순수한 얼굴로 음모를 꾸미고 있는 영화 속 빌런의 반전을 확인한 기분이랄까? 이 가게에는 칼국수를 단품 메뉴로 팔기도 했고, 같은 육수가 분명 들어갔을 조개 전골 요리를 먹은 우리는 코스의 마무리로 칼국수 사리를 넣었다. 우리가 먹은 조개 전골은 큰 범주에서 보면 조개가 듬뿍 들어간 <해물 칼국수>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칼국수도, 조개 전골도 나쁜 짓은 못 할 것 같은 순박한 얼굴이지만 그 안에 상대를 공격할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불짬뽕이나 엽기 떡볶이처럼 보기만 해도 정수리에 땀이 차오르는 포스를 가진 게 아니라 방심을 부르는 착한 얼굴에 그렇지 않은 내공을 가진 조개 전골이 부러웠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조개 전골처럼 결정적인 한 방을 품은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루한 이론 공부보다 효과 좋은 게 실전 경험. 조개 전골의 내공을 배우려면 직접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이번 겨울, 더 자주 조개 전골집에 가야만 할 이유가 내게 생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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