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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Nov 19. 2021

돈가스 먹으러 도서관에 가야지

제주 서귀포 <삼매봉 153>의 수제 돈가스 영접기


도전하는 여행 말고 머무는 여행을 좋아한다. 여행이란 자고로 떠나는 일인데 이게 무슨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만큼 모순적인 말일까? 새로운 것과 마주할 때 다른 사람들보다 에너지가 많이 쓰이는 성향이다. 그래서 새 학기, 새 사람, 새 직장, 새 공간, 새 프로젝트 등 단어 앞에 ’ 새’가 붙는 순간 몸과 마음이 함께 얼어붙는다. 그러니 여행도 갔던 곳에 가는 걸 좋아한다. 낯선 곳에 가서 새롭게 적응하는 것보다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을 정해 두고 에너지가 바닥났을 때 그곳으로 돌아가 에너지를 채운다. 멀게는 영국 런던이 있고, 중간쯤에 일본 오사카 나카노시마가 있고 가장 가까운 곳에 제주 서귀포가 있다.       


지난가을, 큰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에너지 게이지 바늘이 0에 가까워진 걸 느꼈을 때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마음 같아서는 런던으로 튀고 싶었지만, 코로나 19 시국과 통장의 현실은 내게 제주행 비행기만 허락했다. 늘 그렇듯 제주공항에 내리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귀포로 내달렸다. 복닥거리는 현실에서 멀리, 더 멀리 가고 싶어 대한민국 땅 맨 끄트머리에 있는 서귀포에 닿았다. 늘 묵는 호텔에 짐을 풀고, 뒹굴뒹굴하는 날들. 잠을 자고, 책을 읽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맥주 한 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복붙‘한 시간. 이름난 관광지, 안 먹고 오면 후회한다는 맛집, SNS 업로드용 ’갬성’ 카페도 하나 없는 심심한 여행. 1분 1초를 아껴가며 쫓기듯 관광지를 찍는 여행이 아니라 동네 산책하듯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며 시간을 보낸다. 커피는 이른 아침이라면 <유동 커피>의 아이스 라떼 그 외의 시간이라면 스타벅스 서귀포점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식사는 분식집 김밥이나 모닥치기, 시장 골목의 오래된 보리밥집. 맥주는 호텔 근처 편의점에서 산 4개 만 원짜리 세계 맥주로 채운 날들이다. 평소라면 분식류의 탄수화물 폭탄이나 카페인을 과하게 먹지 않도록 자제하겠지만 여행을 핑계로 잠시 이성의 끈을 놓는다. 산책은 주로 <칠십리시공원>에서 시작해 새연교를 거쳐 새섬까지 크게 한 바퀴 돌고 오는 코스다. 적당한 높낮이는 다리 근육에 힘을 채워주고, 인생샷을 남기느라 애쓰는 관광객들에 치이지 않고 조용히 내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길이다.      


그 산책길 중간쯤에 <삼매봉 153>이 있다. 삼매봉 도서관 안에 있는 구내식당 격 음식점. 주로 도서관을 오가는 학생과 동네 주민들이 간단히 식사를 하는 곳이다. 나의 구내식당 사랑에는 역사가 있다. 관광객을 위한 닳고 닳은 음식 말고 현지인들의 평범한 식사가 궁금할 때, 외부인에게도 출입을 허락하는 구내식당이라면 조심스럽게 도전해 보는 코스다. 일본 간사이 지방 수재들은 어떤 밥을 먹을까? 궁금해 처음 교토 대학 구내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간 적이 있다. 밥 하나에 반찬 두 개의 단출하게 학식을 먹던 학생들 사이, 동행과 나는 쟁반 가득 온갖 반찬을 뷔페처럼 늘어놓고 소심한 호들갑을 떨며 식사를 했다. 그때의 편안하면서도 색다른 경험은 그 후에도 종종 시청이나 관공서, 대학 등 여러 곳의 구내식당으로 나를 이끌었다.      


아마도(?) 한반도 맨 끝에 있을 구내식당, <삼매봉 153>에 들어섰을 때는 1시 반이 넘은 시간이었다. 점심 피크가 끝났으니 좀 한적하겠지 싶었는데 예상은 깨졌다. 트레이닝복 차림의 학생부터 시끌시끌한 가족 손님까지 적지 않은 사람들로 작은 식당 안이 북적였다. 일단 자리 여유가 있는 걸 확인한 후 여행객이 아닌 척, 동네 주민 출신 장수생 코스프레를 하며 입구에 있는 키오스크 앞에 섰다. 이미 오기 전에 마음속에 메뉴는 정해 놨다. 6,000원짜리 수제 삼매봉 돈가스. 제주산 돼지를 이용해 직접 만든 돈가스였다. 하지만 메뉴판 정독이 취미인 사람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매의 눈으로 다른 메뉴들도 슥~ 훑어봤다. 제주산 영귤 소스를 뿌린 탕수육, 제주산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간 특선 올리브 짜장면의 유혹도 거셌다. 하지만 처음이니 대표 메뉴를 먹어 보는 게 초심자의 순리. 수제 삼매봉 돈가스를 주문하고 각종 식사 장비를 챙겨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내 주문 번호의 음식이 완성됐다는 소리에 용수철이 튀어 올라 돈가스를 데려왔다. 소스가 듬뿍 뿌려진 어른 손바닥 만한 두툼한 돈가스와 감자튀김 몇 개. 밥 한 덩이와 채 썬 양배추 샐러드, 케첩이 전부인 식사. 갓 튀겨내 열을 머금은 돈가스를 잘라 입으로 후후 두 번 불어 식힌 후 입에 넣었다. 와사삭 튀김옷이 부서짐과 동시에 볼륨감 있는 돼지고기가 치아에 닿았다. 잡내 없는 고기는 탄력 있게 씹혔고, 씹을 때마다 육즙이 기분 좋게 흘렀다. 오물오물 씹는 사이 입안에는 그전에는 먹어 보지 못한 소스 맛이 느껴졌다. 보통 돈가스 소스에 비해 묽고 연한 맛. 하지만 은은한 사과 향과 마늘 향이 안전거리를 두고 돈가스를 호위하는 느낌. 돼지고기를 튀긴 요리기에 기름지고 육덕진 맛이라고 생각했는데 돈가스도 수채화 맛이 날 수 있구나! 처음 느꼈다. 원재료인 돼지고기부터 소스까지 그 흔한 공장 맛이 나지 않았다. 지금껏 먹어 왔던 이름만 ‘수제‘인 돈가스들과 다른 ’ 진짜 수제‘ 돈가스였다. 제주가 전국에서 손꼽히는 학구열 높은 지역이라더니 이런 돈가스를 먹으러 도서관 오다 보면 절로 성적이 오를 맛이다.      


6,000원의 호사를 제대로 누리고 다 먹은 그릇을 반납하기 위해 퇴식구로 향하던 길, 고개를 살짝 돌려 슬쩍 주방 내부를 훔쳐봤다. 내일의 돈가스가 될 돼지 고깃덩이들이 망치 마사지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화구에서는 달콤한 사과향기가 폴폴 풍기는 소스가 끓고 있었다. 이름만 수제가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한 시간. 단돈 6,000원. 냉동 제품을 튀겨 시판 소스를 뿌려 나왔어도 감지덕지할 가격에 이토록 정성스러운 돈가스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그릇을 퇴식구에 넣으면서 주방 안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평소보다 톤을 높여 큰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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