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사 Feb 28. 2022

쌍쌍바를 반듯하게 자르는 법

나를 괴롭히는 마음의 불균형


덤벙거리던 어린 시절, 유일하게 진지해지는 시간이 있다. 바로 하나를 사면 둘이 나눠 먹을 수 있는 아이스크림 ’쌍쌍바’를 자르는 순간이다. 사 남매를 키우는 여유 없는 집에서 자란 탓에 쌍쌍바를 먹고 싶지 않아도 먹어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 어른들의 입장에서는 한 개 값으로 두 명의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쥐여줄 수 있으니 이보다 합리적인 선택이 없을 거다. 문제는 공평함. 뭐라도 더 갖지 않으면 손해 보고 빼앗기는 기분을 품고 살았던 셋째 딸은 미세하게라도 양이 적은 쌍쌍바가 손에 쥐어지면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동생의 생떼에 지친 언니들은 자신들의 특권이었던 ‘쌍쌍바 분할권’을 내게 넘겼다. 늦게 태어난 주제에 언니들보다 뭐라도 넘어서고 싶어서 안달 났던 난 솔로몬 왕보다 공평하게 쌍쌍바를 자르리라 다짐하며 아이스크림 막대를 양손에 쥐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최대한 양쪽 손에 힘을 고르게 분산시켜 쪼겠다. 이때부터였을까?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때가... 내가 심혈을 기울여 자른 쌍쌍바는 영락없는 ’ㄱ‘자였다. 언니들과 마찬가지로 불공평한 쌍쌍바를 만들어 냈다.     


그 후에도 종종 쌍쌍바를 먹었지만 제대로 잘린 쌍쌍바를 먹은 건 성인이 된 후의 일이다. 그날도 다들 술이 흥건하게 취했고, 집에 가기 전 습관처럼 편의점에 들렀다. ’오늘은 내가 쏜다‘는 한 선배의 말에 취향대로 해장 아이템들을 찾아 흩어졌다. 곧 숙취 해소제, 커피, 바나나맛 우유, 컵라면이 계산대에 올랐고 그 사이에 쌍쌍바도 있었다. 반가움도 잠시, 선배에게 어릴 때 내게 쌍쌍바는 ’불공평의 상징‘이었다며 고자질하듯 말했다. 내 말을 들은 선배는 봉지째 쌍쌍바의 오목한 부분을 뚝 꺾었다. 그 모습은 마치 30년 차 도수 치료 전문가 같았다.        


“이렇게 하면 누구 한 사람 서운 할리 없는 공평한 쌍쌍바가 되는 거지.“

”와~ 천재다. 이런 방법이 있었네? “        


지금도 나는 많은 것을 나눈다. 글의 단락을 나누고, 생각을 나누고, 마음을 나눈다. 하지만 쌍쌍바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사람이라서일까? 반듯하고 공평하게 나눠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짜장면을 먹기 위해 나무젓가락을 자를 때처럼 매번 한쪽이 불룩하다. 나무젓가락이야 나만 쓰는 거니까 그 정도의 불편은 감수하면 되지만 살다 보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나는 마음을 홀딱 줘버렸는데 상대에게서 돌아오는 마음이 엇비슷하지 않아서 시무룩해지곤 한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내가 하고 싶어서 해 놓고도 이렇게 늘 본전 생각을 한다. 내가 들인 시간과 수고를 알아주길 바라고 시작한 것도 아닌데 매번 허탈해진다.           


주고받은 마음이 불공평한 건 아닐까? 하는 삐죽한 마음이 올라올 때, 봉지째 쌍쌍바를 나누던 선배의 그 단호한 손놀림을 떠올린다. 손의 감각만으로 쪼개는 미련 없는 그 손끝에서 답을 찾는다. 더 갖지 못해 안달 난 마음을 진정시키고, 애초에 사람과의 관계는 수평 저울이 아니라 시소에 가깝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오르락내리락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고, 줄 때가 있으면 받을 때도 생기기 마련이다. 하나의 관계로 보면 손해 본 것 같아도, 크고 넓게 보면 총량은 결국 비슷할 거라는 막연한 기대. 그런 너그러운 마음을 품고 살려고 노력 중이다. 덕지덕지 미련을 붙여가며 손해 볼까 두려워 아등바등 사는 대신, 흐트러지고 찢어진 마음을 느긋하게 이어붙이며 사는 쪽을 난 택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