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외우는 주문
코로나19로 하늘길이 닫히기 몇 해 전, 일본 시즈오카로 여행을 갔다. 딱히 아는 것도 없었고, 궁금한 것도 없는 동네. 그저 시간이 맞았고, 마침 비행기 표가 싸서 떠난 곳이었다. ‘어디로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디로든 ‘떠나는 게’ 중요한 순간이었다.
비행기 티켓을 끊고서야 시즈오카에 대해 알아봤다. 도쿄에서 신칸센을 타면 1시간이 걸리는 지방 소도시. 후지산과 녹차가 유명한 고장. 그게 다였다. 자연스레 여행의 포인트는 후지산에 꽂혔다. 그때만 해도 등산에는 관심이 없었으니 후지산에 오를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후지산이 보이는 명당들을 찾아다녔다. 후지산을 바라보며 뜨끈하게 몸을 지질 수 있는 노천온천이 1순위. 후지산 뷰를 안주 삼아 느긋하게 식사를 할 수 있는 호텔 뷔페가 2순위. 그 외에 후지산이 물 위에 비치는 호수, 후지산을 모티브로 한 기념품을 파는 곳 등등 모든 일정의 주어는 후지산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게 호기심을 자극했던 곳은 미호노 마츠바라였다. 바다와 후지산을 한 번에 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1km에 가까운 흑송(黑松)이 늘어선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까만색 모래가 가득한 해변에 닿고, 바다에 둥실 떠 있는 것 같은 후지산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짐을 풀었던 시즈오카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30여 분. 고만고만한 낡고 낮은 건물과 정돈된 집들이 늘어선 조용한 동네에 내렸다. 이런 곳에 바다가 있다고? 연신 스마트폰 지도와 동네를 번갈아 보며 의심을 지우지 못한 상황. 혹시 엉뚱한 곳에 날 내려준 건 아닐까 싶어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길로 떠나는 버스의 뒤꽁무니를 쳐다보려 고개를 든 순간 깜짝 놀랐다.
차도 몇 대 다니지 않는 한적한 도로 저 끝. 그곳에 후지산이 우뚝 서 있었다. 버스가 점처럼 작아질 만큼 멀리 떠났는데도 후지산은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원근감을 무시하는 그 어마어마한 자태에 비현실적인 판타지 세계에 뚝 하고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오른 가장 높은 산은 남한에서 제일 높은 산인 한라산이었다. 한라산의 높이가 1950m. 후지산의 높이가 3776m. 두 산의 차이가 1826m니까 거의 2배에 가까우니 충분히 압도당할 크기였다. 이 상황이 믿을 수가 없어 눈을 비비고 다시 후지산을 봤지만, 후지산은 멀리, 저 멀리에 있었다. 후지산을 뒤로하고 바다로 향하는 소나무길을 걸으며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자동차 사이드 미러에 쓰여 있는 문구. 그때의 상황이라면 아마 이렇게 바꿔야 하지 않을까?
‘후지산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멀리 있음’
크기가 워낙 크다 보니 손에 닿을 듯 가까워 보여도, 실제로는 손에 닿을 리 없는 먼 곳에 후지산이 있었다. 이렇게 쫄보인 난 뭐든 실제 크기나 거리보다 더 거대하고, 더 가까이 있다고 느끼곤 한다. 목이 조이고 숨이 막힌다. 그래서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칠 준비부터 했다. 실체에 가닿지도 않았으면서 일찌감치 도망치는 버릇은 많은 기회를 내게서 빼앗아 갔다.
겁이 차오르고,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도로 끝 병풍처럼 서 있던 웅장한 후지산을 생각한다. 저렇게 크고 가깝게 보여도, 실제로는 멀리 있을 거야. 나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것들은 생각만큼 가까이 있지 않으니, 언젠가 나를 덮친다 해도 대처할 여유가 충분하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섣부르게 쫄지 말고 담담하게 받아들이자. 제아무리 거대한 고민이라도 내 마음이 더 크고 단단하다면 훌쩍 뛰어 넘길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