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니까
부잣집에 초대를 받았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었고, 잔뜩 긴장한 채 경기도 끄트머리에서부터 지하철을 타고 꾸역꾸역 서울 한복판 부자 동네로 갔다. 주차장에는 휘황찬란한 로고를 뽐내는 차들이 줄지어 잠자고 있었다. 조심조심 초인종을 누르자 인터폰으로 일일드라마의 회장 사모님 같은 온화한 미소의 집주인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현관 앞 대리석 조각상 위에 인형 같은 자태로 앉은 흰색 털의 먼치킨 고양이가 우리를 먼저 맞아줬다. 고양이 털의 윤기만 봐도 얼마나 세심한 관리를 받는지 알 수 있었다. 세상의 조급함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표정의 고양이. 추울 때는 따뜻하고, 더울 때는 시원하고, 때 되면 밥 나오고, 장난감이 넘쳐나고, 간식도 입맛에 안 맞으면 퉤 뱉어 버려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이곳은 그에게 세상의 전부일까?
의례적인 인사가 오가고, 몽골 초원처럼 광활한 대리석 테이블이 자리 잡은 다이닝 룸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테이블 위에는 꽃과 간단한 다과가 차려져 있었다. 여기서 ‘간단한’은 내가 느낀 게 아니고, 집주인의 입에서 나온 수식어였다. 시그니처인 H 로고가 선명한 명품, 에*메스 접시 위에 아이 주먹만 한 빨간 딸기와 황소 눈망울만 한 초록 샤인 머스켓이 인심 좋게 쌓여 있었다. 낯선 사람이 있는 어색한 자리에서는 뭘 넘기지 못하는 까탈스러운 성격이라 눈앞의 과일 동산을 두고도 조용히 이야기만 경청했다. 베풀기 좋아하는 집주인은 이 분위기를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대화를 잠시 멈추고 참석자들의 개인 접시에 일일이 딸기와 포도를 놔줬다.
“좀 드시면서 하세요.
손님 오신다고 해서 큼직한 걸로
골라 왔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딱 봐도 킹스베리였다. 사이즈, 모양, 구매할 주인의 재력까지... 이름표는 붙어 있지 않았지만 딸기의 제왕, 킹스베리가 맞았다. 백화점에서나 봤던 킹스베리를 직접 영접하기는 처음이었다. 딸기 철이 되면 어른 손바닥만 한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긴 딸기를 사서 벌벌 떨며 아껴 먹는 나. 그마저도 한 박스에 1만 원이 내가 정한 딸기값의 마지노선이다. 딸기를 좋아해도 그 이상의 가격을 지불하면서 먹을 깡은 없다. 그런 내 눈앞에 같은 양이면 적어도 신사임당 님은 출동해야 할 정도로 몸값 비싼 킹스베리가 있다. 내 앞에 놓인 탐스러운 딸기를 거절할 수 없었다. 불편함보다 호기심이 앞선 순간, 타이밍을 살펴 킹스베리를 한입 베어 물었다.
아... 킹스베리는 이런 맛이구나!
한 톨을 탁 털어 넣는 게 아니라 두 세입으로 베어 물어야 하는 딸기. 입안 가득 들어간 킹스베리를 우물우물 씹으니 딸기향과 함께 섬세한 육질이 씹히고, 주스처럼 넉넉한 과즙이 느껴졌다. 그런데 희한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탐스러운 딸기가 이토록 맛이 없을 수가 있을까 싶어 놀랐다. 만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대왕 딸기, 킹스베리는 보기에만 좋았지 기존에 즐겨 먹던 ‘죽향’, ‘장희’ 보다 향도 맛도 옅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부잣집을 나왔지만 가슴속에는 킹스베리만 남았다. 내 인생의 첫 킹스베리여서가 아니었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킹스베리는 그 집 사람들과 꼭 닮아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하고 탐스러웠지만,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의 맛, 사는 맛은 없었다. 달지도 쓰지도 시지도 않은 그저 맹맹하기만 했다. 훈훈한 외모, 어디서도 뒤지지 않을 재력, 모두가 부러워할 스펙, 세상이 인정하는 사회적 명성까지 골고루 갖췄지만 정작 중요한 인간적인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 가져도 정작 맛이 없을 수가 있었다. 어쩌면 그날 나는 유독 운이 나빴을 수 있다. 그곳에는 달고 맛있는 킹스베리가 대부분이었는데 유독 맛없는 딸기 하나가 내 접시 위에 올라왔을 수 있다. 그렇게 킹스베리와의 어긋난 만남은 숙제를 남겼다.
보이는 것에 좌우되던 날들이 있었다.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떤 차를 타는지, 어떤 집에 사는지를 보고 사람을 판단했었다. 하지만 그건 그 사람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 중 하나일 뿐이었다. 어떤 책을 읽는지, 어떤 취미를 가졌는지, 어떤 부분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를 알려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을 차근차근 쌓아야 한다. 나라는 인간의 맛을 채우기 위해 좀 더 부지런해지기로 했다. 만날수록 텅 빈 맛이 느껴지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