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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pr 21. 2022

익숙한 아이디에서 짠 내 나는 별점을 확인했을 때

친분과 평가의 상관관계


정수기 정기 점검을 했던 매니저가 돌아간 다음날, 정수기 회사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해당 서비스에 대한 만족도 조사를 위한 거였다. 내가 집에 없어 상황을 고스란히 지켜봤을 엄마께 어땠냐고 물었다. ‘어떻긴 뭐 어때? 하던 대로 잘하지.’ 이 말에 별 고민 없이 별 다섯 개를 눌렀다. 음식점에 가도, 배달 음식을 시켜도, 호텔에 가도, 미용실에서 머리를 해도, 영화를 봐도 별점으로 연결된다. 더 나은 결과 혹은 서비스를 위한 만족도 조사를 위해 소비자들은 별을 쏘고, 생산자들은 그 별을 줍는다.      

 



매번 다섯 개의 ‘별’을 쥐고 평가를 했던 나도 ‘별’로 평가를 받게 됐다. ‘호사’라는 이름을 달고 책이 세상에 나왔을 때, 무시무시한 별점 평가대에 처음 올라 봤다. 부모, 형제, 친구, 동료, 선후배 등 얼굴을 아는 사람들에게 평가를 받아 왔지만 불특정 다수에게서 별로 평가를 받기는 처음이었다. 책으로만 나를 알게 되는 사람들이니 그들의 평가를 적절히 수용하되 일희일비하지 말자 생각했다. 온라인 서점의 평점 부분 스크롤을 스르륵 내리던 순간, 낯익은 아이디를 보고 손이 멈췄다. *로 중간 알파벳 몇 개가 가려져 있었지만 앞과 뒤, 그리고 붙은 숫자까지 낯설지 않은 아이디였다. 어떤 평을 했을까? 별은 몇 개를 줬을까? 궁금했다. 얼굴을 알고, 가족의 안부를 묻고, 종종 만나 수다를 떠는 사이. 우리의 친밀도를 별점으로 따지면 별 4개를 넘어 별 5개에 가까운 관계. 그러니 은근히 기대했다. 나의 출간을 누구보다 뜨겁게 축하하고 응원해 줬던 친한 사이니까 후한 별점을 줬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차가웠다. 평균 이하의 별점. 냉혹한 평가. 확인하는 순간 팔팔 끓는 용암을 뒤집어 쓴 듯 얼굴이 화끈 거렸다. 직접 자기 돈 들여 구매한 평가자라는 딱지가 붙었으니 ‘협찬 리뷰어’들처럼 호평 일색으로 꾸밀 필요도 없었다. 마음의 짐 따위는 없이 자신이 낸 돈만큼 시원하게 평을 써줬다. 냉엄한 평을 보는 순간은 솔직히 서운했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고민 끝에 어떤 노력을 쏟아 어떻게 책을 냈는지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냉정한 평가가 회초리처럼 따갑게 닿았다. 평소에도 각종 콘텐츠는 물론 정치, 사회, 문화, 사람까지 분야를 막론하고 평론가 뺨치게 냉혹한 평가를 아끼지 않는 시니컬한 분이었다. 그러니 내 책도 예외는 아니었다.      


친분과 소비자로서의 평가는 별개였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그가 쏜 짠내 나는 별점과 쓴 후기를 보고야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분과 약속이 잡혔고, 식사를 하며 수다를 떠는 내내 그의 얼굴 안에는 별점이 둥둥 떠다녔다. 나의 딴생각을 눈치 채지 못하게 머리를 살짝 흔들어 정신을 차려 보려 했지만 헤어질 때까지도 그의 뒤통수에 박힌 별들이 나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돈을 지불했으니 응당 가져야 할 소비자의 권리를 충실하게 수행했을 뿐인데 나는 왜 서운했을까? 수령님을 찬양해야 하는 북한도 아니고, 자유민주국가에서 소비자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게 잘못은 아닌데 말이다. 오히려 시간과 에너지를 써서 별점을 누르고, 후기를 올려준 자체에 감사해야 했다. 친분과 평가는 별개다. 친하니까 더 좋게 봐주리라는 섣부른 기대를 제멋대로 키운 내 문제였다.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우리가 남이가’ 정신이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안도 어떻게든 공동체로 묶어 보려는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아무리 친하다 해도 남은 남이다. 내가 될 수 없다. 나의 바람을 남에게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늘과 땅이 바뀌고, 지구가 뒤집힌다 해도 영원히 남은 남이고 나는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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