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톡 까놓고 차맛은 평범했다
유럽 여행에서 박물관, 성당, 미술관을 빼면 뭐가 남을까? 그만큼 관광지의 지분에 있어서 엄청나게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곳들이다. 최대한 배제하고 싶어도 한계가 있다. 밀덕(밀리터리 덕후)도 아니고 성 마니아(Se... X 아니고 Castle임미다 --;;)도 아닌 내가 에든버러 캐슬에 갔던 이유는 오로지 입장료 때문이었다.
다른 곳들에 비해 월등히 비싼 가격, 무려 16.5파운드(성인 기준)! 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들이 있기에 그 가격을 받는지 삐딱한 미친 호기심이 발동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칼튼 힐로 산책 갔다가 오픈 시간에 맞춰 에든버러 성으로 향했다. 오픈 20분 전이었는데 이미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 관광 전투태세로 입장 대기를 하고 있다. 그 사이에 끼어 스타트 라인에서 총성을 기다리는 고독한 마라토너의 심정으로 오픈 시간을 기다렸다.
정확히 9시 30분이 되자 칼같이 오픈한다. 앞에 선 대륙 아저씨가 뭐라 뭐라 중국어로 말을 건다.
“팅부동 워쓰 한궈런(못 알아들어요. 한국인입니다)”로대꾸 했지만 계속 중국말을 한다. 왜인지 사알짝 기분이 상한다. 나 중국 사람처럼 생겼나?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대륙의 많은 분들은 어디서든 누구한테든 중국말을 한다. 온 지구에 동양인은 모두 중국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상대방이 외국인임을 밝혀도 변함없다. 중화사상... 부들부들... 아침부터 스크래치 간 가슴을 부여잡고 티켓팅에 성공! 대륙 아저씨들보다 먼저 티켓을 끊었다는 것에 작은 위안을 삼는다. 나란 여자, 작은 것에 상처받고 작은 것에 기뻐하는 소박한 여자다.
부푼 기대감을 안고 성에 입성! 한 곳씩 차근차근 둘러보기 시작했다. 비싼 입장료만큼 알차게 꾸며놓은 거대한 전쟁 박물관 느낌? 딱 그거다. “우리 스코틀랜드인들 짱멋! 우리 정말 용감해!!”라고 전 세계의 관광객들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주입하고 있다. 무수한 침략과 전쟁의 역사가 만든 결과물이겠지만 스코틀랜드 민족의 자부심과 긍지가 뚝뚝 묻어 나온다. 2~3개의 전시관을 보고 나니 금세 피로감이 몰려든다.
알았어 충분히! 너네 용감해! You Win!!
피곤할 때는 카페인이 좀 들어가 줘야 한다. 내 안의 피가 카페인을 원한다. 16.5파운드나 내고 들어갔는데 커피 마시자고 성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성안의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성안에는 여러 개의 카페가 있는데 나는 검표를 하고 들어오는 입구 쪽의 카페에 들어갔다. 고풍스러운 외관과 달리 내부는 꽤 모던하다. 쟁반에 원하는 사이드 메뉴(쿠키, 빵, 스낵 등)를 고르고 주문받는 곳에서 음료를 주문하는 시스템이다. 옆에는 샐러드와 파스타 등 간단한 식사류를 팔기도 한다. 난 스콘과 잼, 클로티드 크림을 고른 후 밀크티를 주문했다. 그리곤 좌석을 찾아 주문대 뒤쪽의 테이블로 향했다. 오 마이 갓! 창밖으로는 에든버러 시내가 펼쳐지는 환상적인 뷰다.
아쉽게도 명당에는 이미 발 빠른 손님들이 착석해 있어 그나마 창가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사실 톡 까놓고 차맛은 평범했다. 그 평범함을 특별함으로 바꾼 열쇠는 바로 그곳이 에든버러 성안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수세기에 걸쳐 켜켜이 쌓여 온 시간의 흔적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그 흔적이 차의 맛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다. 한국에서도 발에 차이는 게 카페지만 그 분위기와 그 뷰는 결코 흉내 낼 수가 없다. 대륙 아저씨가 안겨준 작은 상처와 입장료의 압박, 전쟁기념물들이 안겨준 피로감 모두를 사르르 녹여 버린 차 한 잔. 그 분위기를 다시 느끼고 싶어서라도 언젠가 꼭 한 번 다시 에든버러에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