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사 Jul 29. 2017

런던에서의 마지막 크림티

런던 콜롬비아 로드 꽃 시장 근처 앤티크 숍 안 작은 티룸의 크림티


그날은 5일간의 런던 일정을 마무리하고 밤늦게 메가 버스를 타고 에든버러로 향하는 날이었다.


이번 생에 언제 다시 올지 모를 런던을 오롯이 느끼고자, 휴일의 여유로움이 가득한 런던의 구석 동네를 돌았다. 콜롬비아 로드에 매주 일요일에 꽃시장이 선다길래 그곳으로 향했지만 너무 늦게 도착한 탓인지 꽃의 “ㄲ”도 구경 못했다. 한마디로 허탕을 친 것이었다. 해지기 전까지 다음 일정이 딱히 없던 터라 동네를 정처 없이 근처를 걸었다. 그런데 구글맵에 체크해 두었던 가고 싶었던 티룸이 가까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곧장 직행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21세기에서 18세기 정도로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한 듯 시간의 때가 켜켜이 쌓인 손때 묻은 빈티지 그릇들이 가득했다. 어릴 적 봤던 만화 영화 속 호호 아줌마처럼 푸근한 인상의 수다쟁이 영국 아줌마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아 줬다. 내가 티룸으로 가고 싶다고 하니, 가게 깊숙이 안내한다. 자리를 잡고 보니 멀리서도 이 동네에서 이 아줌마의 존재가 어떤 위치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전원일기 쌍봉댁 마냥 동네 대소사를 꿰뚫고 있는 정보통이신지, 가게 안 밖의 모든 사람들과 수다를 떤다.


그릇 쌓인 가게 깊숙이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작은 티룸이 나온다. 세련됨,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그저 동네 사랑방 같은 작은 티룸이다. 내가 갔을 때도 동네 아줌마로 보이는 팀 한 팀과, 나처럼 작정하고 찾아온듯한 홍콩? 싱가포르 쪽 사람으로 보이는 아시안 커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손수 내린 커피와 향기로운 차, 그리고 종류는 많지 않지만 직접 정성을 담아 만든 각종 스콘과 케이크들이 이방인의 눈과 코를 사로잡는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전문가의 손길이라기보다 동네에서 케이크 좀 굽는다. 소문난 손 큰 아줌마가 만든 듯 투박하지만 재료를 아끼지 않은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영드나 영국 영화에서 흔히 보던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동네 백수 같이 생긴 멀건 청년이 주문을 받는다.

엄마의 가게 한편에 티룸을 차린 건지, 아님 엄마를 도와드리는 건지, 아님 아예 Shop in Shop 개념으로 가게 귀퉁이에 찻집을 낸 건지,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그다지 상업적인 느낌이 드는 가게는 아니었다.


크림티를 주문하고 좀 기다리니 빈티지 그릇으로 세팅된 거대한 세트가 몰려와서 1차 당황!! 큰 포트에 담긴 차와 큼지막한 스콘 두 개, 그릇이 넘치게 담아준 클로티드 크림& 라즈베리 잼까지... 보기만 해도 배부른 세트가 차려져 2차 당황! 사실 한국의 카페에서는 야박했던 클로티드 크림 양에 늘 아쉬웠던 마음이 컸다. 한국에서는 무한 리필이던 김치도, 해외에 가면한 접시 당 가격을 받는 것처럼, 현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인심일 것이다. 무뚝뚝하던 영국 남자 = 카페 주인은 나의 동공 지진을 느꼈는지 살짝 스윗한 미소를 날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Enjoy~”

사실, 혼자 먹기엔 몹시 많은 양이었다. 이미 브릭 레인 마켓에서 먹은 아르헨티나 출신 셰프(?)가 만든 두툼한 스테이크 버거가 아직 뱃속에 남아 있던 걸 감안하고서라도 매우 많은 양이었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 여자에겐 밥 배(=식사 배)와 디저트 배가 별도다. 아무리 밥을 많이 먹어도 디저트 먹을 공간은 늘 남아 있다. 아마도 런던에서의 마지막 크림티가 될 이 순간을 난 최선을 다해 즐기기로 한다.

우선, 은은하게 향이 차오른 밀크티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따끈한 스콘을 한 입 크기로 잘라, 치덕치덕 클로티드 크림을 듬뿍 바른다. 입안에 밀크티의 쌉싸래함이 달아나기 전에 얼른 클로티트 크림 옷을 입은 스콘을 넣었다. “아… 여기가 천국인가?”, “이게 바로 본토의 맛이구나!” 세련됨은 1도 없는 투박한 맛, 영드에서나 보던 고풍스러운 분위기, 그리고 여행자의 여유 넘치는 마음이 한데 어우러져 완성된 완벽한 순간이었다. 5일의 런던 여행기간 동안 쌓여 온 마음속 자잘한 상처들(일명 여행 생활 기스)을 완벽하게 아물게 해 준 런던에서의 마지막 크림티이자 최고의 크림티였다.


푸짐한 크림티를 먹으며 생각했다. 10여 년 전 나는 빅벤을 처음 보고 “어떻게 건물 자체 만으로 이런 감동을 줄 수 있지?”라고. 그때의 감동과 충격 때문에 10년 만의 유럽 여행을 다시 계획하면서 굳이 가봤던 런던을 다시 여행 루트에 넣은 것이다.


10년 전의 여행 꼬꼬마는 큰 교훈과, 깨달음을 찾아 유명 관광지만 훑었다. 여행 꼬꼬마는 10년 후, 동네 빈티지 샵의 작은 카페에 먹는 크림티가 주는 감동도 크고 화려하고 세련된 것들이 주는 감동 못지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젊은 시절의 나도 큰 성공이 정답이라고 믿었다. 큰 성공만 쫓다 작은 성공이 주는 기쁨을 놓치며 살았다. 그러나 크고 작은 경험들이 모여 작은 것이 주는 감동과 가치에 서서히 눈뜨게 되었다. 그래서 이 특별할 것도 없는 크림티가 이번 런던 여행의 훌륭한 마침표가 되었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아마 이 크림티가 또 먹고 싶어서라도 꼭 다시 런던행 비행기 티켓을 끊을 것이다. 당장 내년이 될지, 수 십 년 후가 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부디 그때까지 빈티지샵의 크림티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켜주길 바랄 뿐이다.

난 그날을 위해 열혈 일개미 모드로 살아갈 테니...

매거진의 이전글 에든버러 성에서 마신 밀크티가 특별한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