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떠난 시즈오카
모든 게 다 신기했다. 난생처음 온 시즈오카는 지금껏 다녀왔던 일본과 많이 달랐다. 도쿄처럼 빽빽한 고층 빌딩도, 오사카처럼 버거로운 호객행위도, 후쿠오카처럼 넘치는 한국인 관광객도 없었다. 소박한 시즈오카 시내를 벗어나면 흔하디 흔한 작은 동네들이 펼쳐진다. 이 익숙하면서도 익숙지 않은 풍경이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마치 사귀기로 하고 첫 데이트를 하러 나가는 아가씨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두 번째 날 아침, 호텔을 나섰다.
오늘의 첫 번째 목적지는 바다와 후지산을 볼 수 있다는 미호노마츠바라다. 1년 중 12월부터 2월은 후지산을 제일 잘 볼 수 있는 시기라고 한다. 바다와 소나무 그리고 후지산을 볼 수 있는 그곳으로 향했다. 호텔이 있는 시즈오카 역 근처에서 전철을 타고 시미즈로 이동해 다시 버스를 갈아탔다. 시미즈...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축구 선수 조재진이 뛰던 J리그의 프로팀, 시미즈 S펄스의 홈이다. 시즈오카만 알았지 시즈오카 안에 시미즈가 있는지는 그제야 알았다. 이 잔잔하고 작은 도시에도 프로축구팀이 있다니 좀 놀라웠다.
잔뜩 긴장해 창밖과 스마트폰 구글 지도와 버스 안 전광판을 번갈아 보기를 20여분. 버스는 시골 마을의 버스 정류장에 나를 토해냈다. 둘러보니 작은 병원 하나, 문을 닫은 꽃집, 노인들을 위한 데이케어 센터 정도가 있는 곳. 아무리 봐도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흔하디 흔한 편의점 하나 없는 한적한 길에 내리고 보니 이곳이 맞나 연신 구글 지도를 확인했다. 두리번거리며 뒤를 도는 순간, 거짓말처럼 그곳에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후지산 할아버지!
도로 끝, 웅장한 포스를 풍기며 큰 어깨를 펼쳐 환영해 주었다. 그 순간은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졌다.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분명 어디서도 그 발끝도 보지 못했는데 어느새 내 등 뒤에 떡하니 버티고 있던 거였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후지산 후지산 하는구나. 하늘은 눈이 시리게 파랗고 후지산 할아버지의 흰 모자는 더욱 멋졌다.
미호노마츠바라까지는 버스 정류장에서 약 10분 정도 가야 한다. 가게 하나 없는 지붕 낮은 주택가를 걷다 보니 어느새 소나무길이 보인다. 일본 3대 소나무 숲이라고 하는데 딱 일본스럽게 정갈하게 정리된 모습이었다. 유유자적 소나무길을 걷고 있으니 역시 여행은 이 맛이지 싶다. 심야형 인간이라 평소에는 자의로 절대 일어나지 않는 시간에 부지런을 떤 이유는 다 이 한적함을 오롯이 느끼기 위해서다. (그때가 한 오전 8시 30분쯤이었는데, 내가 구경을 마치고 나올 때쯤인 9시 30분쯤에는 일본 국내부터 해외 관광객들까지 단체 여행객들이 줄 맞춰 입장하고 있었다)
조용한 소나무길을 지나 거대한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의 크기만 봐도 이곳이 보통 관광지는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시 입구를 지나 약간의 언덕을 올라 내려가면 검은 모래 가득한 해변이 나온다. 미호노마츠바라다.
강아지 산책을 시키는 사람, 조깅을 하는 할아버지, 나처럼 부지런을 떤 소규모 관광객, 사진을 찍으러 온 작가 등등 많지는 않았지만 각자의 스타일로 미호노마츠바라를 즐기고 있었다.
자석에 끌리듯 바다를 향해 감탄하며 직진하고 있는데, 낯선 사람이 말을 건다. 40대쯤으로 보이는 아저씨. 일알못인 나는 “나 일본어 못해요. 한국인이에요”라고 말을 하고 지나치는데 짧은 영어로까지 말을 건다. 이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도 않아 “쏘리~ 노 땡큐“하고 선글라스를 쓰고 이어폰을 끼고 완전 차단을 한 채 바다로 향했다.
햇빛 부서지는 바다, 그 끝이 태평양과 이어져 있다고 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내 발 끝에 닿는 바닷물들이 태평양과 닿아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바다는 참 신기하다. 끝없이 펼쳐진 물과 맞닿아 있는 하늘, 그 두 가지뿐인데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준다. 그간 전전긍긍 쫓기며 살아왔던 날들의 기억이 파도에 밀려 스르륵 사라진다.
바다만큼 신기한 건 바다를 등지고 뒤를 돌면 바로 후지산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까만 모래와 대비되어 후지산 할아버지의 하얀 모자는 더 하얗게 빛났다. 후지산 할아버지의 신묘한 자태를 감상하고 있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나의 온전한 시간을 방해하는 자가 다시 나타났다. 커다란 매인지 수리인지 알 수 없는 맹금류 새와 시끄러운 까마귀들이 머리 위를 빙빙 날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없었다면 무척이나 공포에 떨었을 것이다. 쌀 한 가마니에는 약간(?) 모자란 몸무게이니 낚아 채일 염려는 없지만, 조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성향 때문에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점심을 먹기 위해 찜해둔 식당이 문 여는 시간까지 약 1시간 정도가 남았다. 찬 바닷바람을 피해 에스퍼스 드림플라자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마니아라면 좋아할 마루코짱 랜드와 라무네 박물관이 있는 그곳. 참치와 초밥을 소재로 한 스시박물관 있는 쇼핑몰이다. 하지만 난 일본 애니 마니아도 아니고 회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매장을 구경하지 않고 사람들을 구경했다. 평일 오전의 쇼핑몰은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노인들과 인근에서 단체로 놀러 온 어린이집 원생들이 전부였다. 인간의 삶, 그 시작과 끝과 닮은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식당이 오픈하기를 기다렸다.